대만 총통 후보인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14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주리룬 국민당 후보도 15일 타이베이에서 유세 차량에 탄 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오른쪽) 타이베이/AP EPA 연합뉴스
‘쯔위 사건’은 한국 사회가 중국과 대만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세계는 한류 등 여러 나라 문화 콘텐츠 소비와 여행 등을 통해 점점 문화권의 벽을 허물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 시민들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지배적인 경제적 거래 상대인 중국과 일본에 눈길을 줄 뿐, 대만은 상대적으로 주된 시야 밖에 두고 있다. ‘쯔위 사건’을 계기로 ‘쯔위의 나라’ 대만에 대해 알아야 할 사안들을 8가지 열쇳말을 통해 풀어봤다. 대만은 한국 사회와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진 나라였다.
1. 일본 식민지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 지배를 거부하는 움직임과 함께 20년 동안 게릴라식 무력 저항을 했지만, 결국 진압됐다.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분리통치 전략을 썼다. 대만 원주민들은 탄압하고, 명나라와 청나라 출신들을 우대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통치보단 유화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일본은 대만을 무역 중계 거점으로 삼기 위해 사회기반시설 인프라를 조성했다.
대만인들은 식민 지배를 한 일본에 대해 반감보다 호감이 강하다. 식민 지배 당시엔 대만이라는 국가 정체성이 약했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식민 지배가 종식된 뒤 대만 사회를 통치한 국민당 정부의 폭력 지배와 정치적 억압이 강력한 저항을 낳았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일본 문화는 여전히 대만 사회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2. ‘본성인’과 ‘외성인’
2015년 7월 현재 대만 인구의 98%는 한족(漢族)이다. 대륙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대다수인 셈이다. 애초부터 타이완에 살고 있던 원주민 비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
한족은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나뉜다. ‘본성인(本省人)’은 초기 이주자들이다.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 대만에 건너와 터전을 잡았다.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84%를 차지한다.
‘외성인(外省人)’은 장제스의 중국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패하면서 대만으로 밀려온 1949년 전후에 대만으로 함께 건너온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14% 정도를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은 외성인들은 인구가 적음에도 중국국민당 정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고급 관리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기득권층을 이뤘다. 게다가 1947년 발생한 2.28 사건을 계기로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3. 대만판 ‘광주민주화항쟁’ 2.28사건
대만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 공산당에 쫓겨와 대만 통치를 시작한 국민당 정부는 정부의 허가없는 담배 판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에서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공무원에게 단속되면서 소총 개머리판으로 심하게 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주변 시민들이 항의하자 공무원은 발포했고, 본성인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2월28일 분노한 군중들이 봉기했고, 경찰서를 공격했다.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국민당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길 원했고, ‘2.28 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했다. 처리위원회는 공정하게 사건을 조사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하지만 3월8일 대륙의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도착했고, 대대적인 유혈 진압이 시작됐다. 처리위원회 인사들이 상당수 처형됐고, 본성인들도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학살은 5월까지 진행됐다. 이 사건은 이후 40년 가까이 언급되지 못하다, 1992년에 이르러서야 <2.28 사건 연구 보고>라는 정부 보고서를 통해 공식화했다. 희생자가 3만명에 달한다고 추산됐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연출과 양조위 주연의 1989년작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는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 양안 관계
양안(兩岸) 관계는 분단국가인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말한다.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대륙(서안)과 대만(동안)으로 마주보는 관계임을 일컫는 용어다. 대만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양안 관계라는 말로 두 나라 사이를 표현한다. 1971년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인정됐고, 대만은 유엔에서 탈퇴했다. 대만은 올림픽에 출전할 때도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대만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올림픽용 깃발과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란 명칭을 사용한다.
5. 92 컨센서스(九二共識)와 ‘창조적 모호성’
1987년 대만 정부가 중국 대륙에 있는 이산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가족 방문을 허용하면서 대만과 중국이 대화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행정적인 협의가 필요하게 됐고, 1992년 10월 홍콩에서 협상을 했다. 하지만 중국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라”고 주장했고, 대만 대표단이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상 도중 베이징으로 귀국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하지만 이후 몇 년 동안에 걸쳐 협상을 진행하면서 중국 대표단은 이런 ‘합의’ 사항을 요구했다.
“좋다, 하나의 중국이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너희는 중화민국. 중화민국을 인정할 순 없다. 다만 하나의 중국은 합의하고, 그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 알아서 정의하도록 하자.”
합의를 한 건지 아닌 건지도 모호한 이런 상황에 대해 학계에선 ‘창조적 모호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호하지만, 어쨌든 서로 돌파구가 생긴 셈이다.
‘92 컨센서스’라는 용어가 공식화한 건 2000년 들어서다. 50년 넘게 대만을 통치해 온 국민당 정부가 2000년 초반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에게 정권을 내줬다. 대만 사상 첫 번째 정권교체였다. 민진당은 ‘대만독립’을 내세우는 정당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국민당 정부의 마지막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 격) 수치(蘇起) 주임위원(장관급)이 이를 막기 위해 ‘92 컨센서스’ 개념을 공식화한 것이다. ‘92 컨센서스’는 한자로 ‘92공식(九二共識)’이라고 쓴다. 양안 관계의 공동인식이라는 뜻이다.
6. 해바라기 운동과 입법원 점거
차이잉원을 압도적인 총통 당선자로 등극시킨 이번 대만 총통 선거는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68%)을 기록했다. 하지만 젊은층의 열기는 뜨거웠다. 1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대만 양안정책협회의 온라인 조사 결과를 인용해 134만명의 청년층이 ‘쯔위 사건’ 영향으로 투표 참여를 결정했거나 투표 의향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차이잉원 당선자가 얻은 689만표 가운데 19.5%가 ‘쯔위 사건’에 격분한 젊은층의 몰표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쯔위 사건’ 이전부터 대만은 이미 국민당 마잉주 정부에 분노하고 있었다. 시발점은 따로 있었다. 2014년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1%에 그쳤고, 실업률은 4%에 육박했다. 이런 와중에 2014년 3월 집권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중국과의 무역협정인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 비준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대학생들이 분노해 봉기했다. 대학생 등 300여명이 한국의 국회 격인 입법원을 3주 동안 점거하고 저항했다.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경제협력 경험을 통해 교류 협력이 늘어나도 결국 이익을 보는 이들은 이미 권력이 있고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운동은 입법부 접수에서 멈추지 않았다. 3주에 걸친 입법원 점거가 끝난 뒤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운동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속적인 시민운동과 정당 정치활동, 농·어민 조직과의 협력 노력 등이 그것이다. 청년들은 지방에 마을 단위 농회(한국의 농협)를 돌아다니며 중국의 정책이 대만에 재앙이 되는 데 있어, 농·어민들과 자신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을 설득했다. 이런 요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대만을 움직였다.
7. 증가하는 대만인 정체성
앞서 말했듯 대만인들의 다수는 대륙에서 건너온 본성인 혹은 외성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만인이면서도 중국인이라고도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대만은 1992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국립정치대학교에 위탁해 매년 1만명을 샘플로 뽑아 정체성 조사를 한다. 1996년 조사에서 자신이 ‘대만인이기도 하고 중국인이기도 하다’고 답한 사람은 49.3%로 다수였다. ‘대만인일 뿐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24.1%였고, ‘중국인일 뿐 대만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17.6%였다.
19년이 지난 2015년 조사 결과, 이제는 ‘대만인일 뿐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59.0%로 다수가 됐다. ‘대만인이기도 하고 중국인이기도 하다’고 답한 사람은 33.7로 줄었고, ‘중국인일 뿐 대만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3.3%로 대폭 줄었다.
8. 차이잉원과 노무현
민진당의 차이잉원 대만 총통 당선자는 할머니가 대만 산악지역에 살아온 원주민 파이완 족이고, 부친 쪽 조상은 청나라 시절 중국 푸젠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객가(客家) 출신 본성인이다. 차이잉원은 선거 과정에서 외성인들과 구분 짓기 위해 “객가의 딸이 총통이 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차이잉원은 교수 출신 관료다. 대만국립정치대 법대 교수로 리덩후이 전 총통의 법률 고문을 지냈다. 2000년 중국 관계를 다루는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4년 동안 중국과 협상 테이블을 열면서 외교 관계를 직접 경험했다. 민진당 출신 최초의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패 혐의로 위기에 몰린 2008년 당의 주석이 됐다.
차이잉원의 민진당은 최초로 정권 재창출과 함께 입법원 다수당도 차지했다. 민진당은 입법원 정원 113석 가운데 반이 넘는 68석(종전 40석)을 차지했다. 청년층의 지지를 받은 ‘시대역량(時代力量)’의 의석 5석 등을 합치면 의석 3분의 2 지배까지 넘볼 수 있다. 천수이볜 시절엔 정권은 잡았지만, 입법원에선 소수당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정권 재창출과 함께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 다수당 획득을 함께 경험했다.
차이잉원 총통 당선자는 19일 새 정부 출범 이후 국민당의 자산을 나라에 귀속시키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차이잉원 당선자의 측근들은 국민당의 자산이 대만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이거나 국민당이 독재하면서 축적한 것이어서 몰수하는 게 맞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임기 초반 과거사 진상규명을 추진했고, 열린우리당이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4대 쟁점법안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차이잉원 당선자는 경제적 의존도가 큰 중국과의 관계를 ‘현상유지’하면서 침체된 대만 경제를 살리고, 청년과 저소득층의 복지 문제까지 챙겨야 하는 복잡한 과제를 안게 됐다. 문제는 민진당이 경제 복지 정책 측면에서 국민당과 별반 차별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진당이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지가 정치 격변기 대만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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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