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맨 오른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 둘째)가 지난달 26일(현지시각)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타오르미나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개막식에서 단체 기념사진 촬영 중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정의길 국제에디터석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Egil@hani.co.kr
2차대전 이후 국제체제와 질서는 미국의 산물이다. 세계 최대의 집단안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비롯한 각종 군사동맹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전후의 국제경제 체제인 브레턴우즈 체제에 이은 변동환율제,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및 각종 자유무역협정 지대 등은 미국의 달러가 지탱해왔다.
미국의 힘과 돈이 그 바탕이나, 미국은 이 두가지만을 가지고 국제체제와 질서를 이끌지 않았다. 힘과 돈은 이른바 ‘하드 파워’이고, 이 하드 파워가 작동하게 하는 틀과 규칙인 ‘소프트 파워’ 역시 미국의 몫이었다. 국제체제와 질서를 이끄는 각종 국제기구와 조약, 거래 등도 미국이 규칙을 정했다. 미국은 글로벌 기준의 책정자였다. 예를 들어, 인터넷 운영과 관련된 각종 규약, 금융거래 전산망 등도 미국이 정하고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이런 역할을 위해 자신의 힘과 돈을 썼다. 하지만, 이는 미국에게 비용 대비 효과가 훨씬 컸다.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틀이었고, 미국 기업 등 산업계에 우월한 지위와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이후 미국의 태도는 바뀌고 있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만이 중요하다고 본다. 동맹에 대한 투자와 더 폭넓은 세계적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등은 미국의 국력만 고갈시킨다고 본다. 미국 주도 국제안보 체제를 떠받드는 주축인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양안동맹에 대한 회의와 경멸, 미국이 주도한 각종 자유무역협정 체제에 대한 철수 의사, 동맹국들에 대한 일방적인 부담 강요, 무슬림 입국 금지 및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등 인종주의에 바탕한 다문화주의 부정, 그리고 ‘기후변화는 중국의 사기’라는 극단적 음모론까지 내비쳤다.
결국 트럼프는 1일(현지시각) 미국이 주도한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발표하며, 이 협정이 “미국의 부를 다른 나라에게 대량으로 재분배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협정에서의 철수는 미국 주권의 재주장을 상징한다”고도 말했다. “기후변화는 중국의 사기”라고 말하는 트럼프에게 이런 주장은 놀랍지 않으나, 국제질서를 이끌어온 미국의 지도자가 한 발언이라기에는 충격적이다. 그는 또 “우리는 다른 지도자들과 나라들이 우리를 조소하는 것을 더는 원치 않고, 그들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미국인의 이익에 오점을 남겼고, 지구의 미래에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등 유럽의 동맹국들은 미국을 조소했다.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나토 회원국에 대한 상호방위의무 조항 확인 거부,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을 봉쇄하고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권의 중심으로 두려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철수 등의 조처를 이어왔다. 이 과정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트럼프의 미국을 겨냥해 “유럽인들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에 맡겨야 한다”며 ‘미국으로부터의 유럽 독립 선언’까지 나오게 하는 등 동맹국과 국제사회 구성원들을 밀어냈다.
결국 파리협정 탈퇴로까지 이어지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의 고립’을 불러왔다고 <뉴욕 타임스>는 지적했다. 트럼프는 파리협정 탈퇴로 국제적 지도력의 공백을 만들어, 동맹국이나 적성국 모두에 세계의 권력 구조를 재조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트럼프가 파리협정 탈퇴를 발표하던 날 독일 베를린에서는 메르켈 총리와 리커창 중국 총리가 만나 파리협정 진전을 위한 우호적인 회담을 했다. 특히 파리협정은 기후변화의 주범인 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나온 산물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했고, 중국은 이를 수용했다. 이제 미국이 자리를 뜨자,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이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중국만이 트럼프의 미국이 방기하는 글로벌 표준의 책정자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