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 전체회의에 참여한 박의춘 북한 외무상 앞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선택은 결국 ‘싱가포르’였다. 북한과 미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싱가포르의 중립적 위치, 두 지도자의 이동 거리, 현지의 치안·숙박·언론 접근성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3월 초 김정은 위원장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힌 뒤 거론돼 온 후보지는 △평양 △판문점 △싱가포르·몽골·스위스 등 제3국 등 세 갈래였다. 이 가운데 북한은 평양, 한국은 판문점을 선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평양 개최는 북한에 대한 ‘지나친 양보’라는 이유로, 판문점 개최는 북핵 폐기보다 평화협정 체결에 더 큰 무게가 쏠리게 된다는 ‘상징성’ 탓에 선택받지 못했다. <뉴욕 타임스>는 10일 “김정은 위원장을 더 상징적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는 비무장지대(판문점) 밖으로 끌어내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작은 승리”라고 지적했다.
제3국 중에선 일찍부터 싱가포르가 최유력 후보지로 꼽혀왔다. 싱가포르는 1966년 미국, 1975년 북한과 수교했고 이후 양국 모두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온 ‘중립 지대’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매년 우호국 싱가포르의 국경일(8월9일)에 맞춰 축전을 보낸다. 미국은 물론 북한도 이곳에 직원 4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대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인은 싱가포르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 북-미 정상회담을 수용할 만한 회담장으로는 매년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회의’)가 개최되는 샹그릴라 호텔 또는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센토사섬 등이 꼽힌다. <한겨레>가 11일 현지 호텔들에 다음달 12일 정상회담을 전후로 객실 사정을 알아본 결과, 샹그릴라 호텔은 “3박 이상은 가능하지만, 1~2박 예약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 호텔 직원은 “가끔 행사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예약을 받는다”고 말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북-미 회담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추정도 가능하다. 2015년 11월 66년 만에 첫 양안 정상회담을 연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도 샹그릴라 호텔을 회담장으로 이용했다.
마리나베이샌즈 호텔도 소유주 셸던 애덜슨이 트럼프 대통령과 친한 사이여서 회담장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애덜슨은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에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미 정상들은 일단 하루짜리 회담을 하기로 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일정이 하루 늘어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달 8~9일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데, 곧바로 싱가포르로 온다면 숙박을 할 수도 있다. 두 정상이 호텔 대신 별도의 컨벤션센터 등을 회담장으로 쓸 수도 있다.
북-미 모두에게 싱가포르는 익숙한 외교 무대다. 양국이 이따금 이곳에서 외교 접촉을 해왔기 때문이다. 2008년 6자회담 합의 이행을 둘러싼 이견 조정을 위해 크리스토퍼 힐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김계관 북 외무성 부상이 4월과 12월 각각 싱가포르 미국 대사관에서 만났다. 그해 7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박의춘 외무상을 만난 곳도 싱가포르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기간인 2012년 8월과 2015년 1월에도 양국은 싱가포르에서 1.5트랙 또는 2트랙 대화를 이어왔다.
회담 장소가 싱가포르로 정해진 이상 김정은 위원장은 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와 평양은 4800㎞ 정도 떨어져 있어, 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1호(옛 소련제 일류신(IL)-62M·항속 거리 1만㎞)를 이용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김 위원장은 7~8일 시진핑 국가 주석과 두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중국 다롄으로 갈 때 전용기를 이용했다. 싱가포르 비행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던 셈이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은 196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비동맹 국가회의 참석을 위해 6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한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양국이 미국, 한국, 몽골, 베트남 혹은 태평양의 미 해군 함정 등 여러 잠재적 회담 장소에 관해 토론하면서 ‘정치적인 이슈’와 김 위원장이 북한의 위험한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지 등과 같은 ‘실용적인 고려’ 사이에서 균형을 맞췄다”고 지적했다. 조셉 윤 전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북한은 판문점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치안이 안정된 곳이다. 거친 시위대가 없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세계 주요 방송국이 아시아 지국을 운영하는 중요한 ‘언론 허브’여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성과를 한껏 뽐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기도 하다. 김정은 위원장도 4·27 남북 정상회담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등 언론 대응 센스를 뽐낸 바 있다.
길윤형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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