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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세 번의 비핵화 기회 놓친 북미, 증오 걷어내고 화해할까

등록 2018-06-11 04:59수정 2018-06-11 09:36

세 번의 비핵화 기회 놓친 북미 ‘격동의 70년’

(※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진정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영역이다. 그러나 난 자신감을 느낀다. 김정은은 그의 국민을 위해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길 원한다. 그리고 그에겐 기회가 있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북-미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9일(현지시각)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캐나다를 떠나기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최고 지도자와 미국 대통령의 만남을 그동안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 표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북-미 간에) 이 레벨(정상급)에서 회담이 이뤄진 적이 없다”며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정신으로 회담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는 12일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 이 한번의 기회가 낭비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남겼다.

‘미지의 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에 먼저 도착한 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었다. 그를 태운 에어차이나(중국국제항공) 비행기는 10일 오전 8시39분 평양을 출발해 오후 2시35분(한국시각 오후 3시35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내렸다. 인민복 차림에 안경을 쓴 김 위원장은 활짝 웃으며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영접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저녁에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보다 6시간 늦은 오후 8시35분 싱가포르 파야레바르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샹그릴라 호텔, 김 위원장은 세인트 리지스 호텔에 첫날 여장을 풀었다. 70년에 걸친 갈등과 증오의 시간을 지나, 두 정상이 묵은 숙소의 거리는 고작 570m였다.

오늘에야 이렇게 ‘가까워진’ 북·미의 지난 시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핵’과 그에 대한 ‘공포’였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무려 26발이나 되는 원자탄의 사용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최근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당시 북한이 느낀 공포에 대해 “‘미국이 원자탄 쏘면 다 죽는다’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분위기였다”고 적었다. 북·미는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악수도, 목례도,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문서에 서명만 끝내고 11분 만에 헤어졌다. 미국은 1957년 처음 한국에 핵탄두를 배치했고, 그 수는 한때 900개가 넘었다.

월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맨 왼쪽)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맨 오른쪽)이 1953년 7월27일 오전 회담장으로 쓰던 판문점 목조 건물에서 각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월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맨 왼쪽)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맨 오른쪽)이 1953년 7월27일 오전 회담장으로 쓰던 판문점 목조 건물에서 각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① 첫 번째 기회
남북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핵무기 제조·생산 않고 사찰” 합의
북, 1992년 IAEA 핵안전협정 서명
특별사찰 반발해 이듬해 NPT 탈퇴

미국의 핵 위협을 이유로 북한은 일찍부터 핵개발에 나섰다. 미국 국방정보국(DIA)이 지난 2월 펴낸 <글로벌 핵 풍경>을 보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말 소련과의 연구 협력에 의해” 시작됐다. 1963년 6월 연구용 소형 원자로(IRT-2000)를 도입했고, 1986년 5㎿급 흑연감속로가 가동돼 “매년 6㎏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1968년)이나 도끼 만행 사건(1976년) 등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B-52와 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을 동원해 북한을 위협했다.

이윽고 냉전이 종식됐다. 이는 북한에 위기이자 기회였다. 1990년 9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수교 방침을 전했다. 분노한 김영남 당시 북한 외교부장은 “북조선은 우리가 희망하는 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소련이 자신들을 배신했으니 독자적 핵개발에 나서겠다는 경고였다.

물론 ‘기회’도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은 1991년 9월27일 전세계 미군기지에서 “지상과 해상의 전술핵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노태우 대통령은 12월18일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은 12월31일 핵무기를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하지 않고,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으며, 비핵화 검증을 위해 사찰을 실시한다”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② 두 번째 기회
미, 영변 핵시설 타격 검토 위기
카터 전 미 대통령, 김일성 만나
핵 동결·남북정상회담 약속받아
북미 1994년 제네바합의 이르러

북한은 이어 1992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조처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이 몰려 있는 영변에 대한 타격을 검토했지만, 개전 초기 3개월 만에 미군 사상자 5만명, 한국군 49만명, 민간인 100만명 이상의 피해가 난다는 예측으로 인해 포기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한반도를 구한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핵개발 동결과 남북 정상회담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북·미는 1994년 10월 미국 등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고 북한은 핵 동결을 한다는 제네바 합의에 이르렀다.

이후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북한은 1998년 8월31일 첫 장거리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대북 강경파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했다. 햇볕정책의 설계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페리를 설득해 마음을 돌렸다. 1999년 10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계획을 전면 중단하도록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킨다는 대북 포용 정책을 뼈대로 한 보고서가 완성됐다.

북·미의 역사적 화해는 손에 잡힐 듯 보였다. 2000년 7월 말 타이 방콕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서 첫 북-미 외교장관회담이 열렸다.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10월10일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만났다. 북·미는 이튿날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0월23일부터 2박3일간 평양을 답방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원래 이때 처음 열릴 예정이었다.

‘세기의 만남’으로 불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이틀 앞두고 싱가포르에 입국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일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회담하기 위해 대통령궁 이스타나에 들어서고 있다.(왼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 밤 싱가포르 파야레바르 공군기지에 도착해 환영 나온 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싱가포르/AP·AFP 연합뉴스
‘세기의 만남’으로 불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이틀 앞두고 싱가포르에 입국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일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회담하기 위해 대통령궁 이스타나에 들어서고 있다.(왼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 밤 싱가포르 파야레바르 공군기지에 도착해 환영 나온 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싱가포르/AP·AFP 연합뉴스
③ 세 번째 기회
2000년 사상 첫 북미 외교회담
조명록은 백악관서 클린턴 만나
“적대 해소” 북미 공동성명 발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평양 답방

더 이상의 기적은 없었다.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네오콘의 세례를 받은 아들 조지 부시가 당선되자, 클린턴 대통령은 평양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2001년 9·11을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 선언했다.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그해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을 가질 권한이 있다. 그보다 더한 것도 갖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를 고농축우라늄(HEU)을 이용한 핵개발 계획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2003년 1월 다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해결 노력이 이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전략적 인내’를 내세워 북과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2012년 5월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선언했고, 2013년 3월 핵개발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 북한은 6번 핵실험을 했고, 2017년 11월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해 미국 워싱턴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상당히 확보했음을 입증했다.

그 이후 18년
부시 2002년 “북은 악의 축” 선언
오바마 ‘전략적 인내’로 대화 단절
북한도 핵실험 계속하며 대결 심화

북-미 간의 지난 70년은 증오와 불신, 실낱같은 기대와 이를 뒤엎어버린 거대한 실망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미지의 영역’에 첫발을 내딛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이 만남은 “5년 전, 10년 전, 아니 25년 전에 이뤄졌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용기 있는 한발을 내디디는 데, 너무 ‘늦은 시간’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길윤형 기자, 싱가포르/황준범 김지은 노지원 기자 charisma@hani.co.kr

[화보] 북-미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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