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일본 총리
공, 탁월한 정치적 후각…임기말 지지 50%
과, 끝까지 신사참배…‘아시아’를 불안하게
과, 끝까지 신사참배…‘아시아’를 불안하게
전후 세번째 장기집권, 임기말 지지율 50% 안팎, 장기불황 종식….
5년5개월간 장수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을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퇴임을 맞기에 충분한 성적표다. ‘사자 머리’에 돌출행동이 잦은 일본 정계 최고의 ‘이단아’ 고이즈미는 대중들에게 자신을 ‘개혁투사’로 인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방향과 정치수법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낡은 정치 타파=일본의 후진적 정치시스템에 혁명을 몰고왔다는 점은 고이즈미의 최대 업적이다. 부패·담합·금권정치의 온상인 자민당 파벌구조를 약화시키고,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가 자리잡도록 했다. 총리 직선제가 아님에도 총리가 파벌의 역학구도가 아니라 여론에 따라 선출될 수 있도록 바꿔놓은 사람이 고이즈미다. 차기 총리가 확정적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이런 정치시스템의 변화의 최대 수혜자다.
고이즈미는 깨끗한 이미지 하나로 자민당의 부패 추문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는 파벌 나눠먹기식 인사를 철저히 배제했다. 업계·관료·족의원의 ‘철의 삼각형’으로 대표되는 이권챙기기 정치와도 담을 쌓았다.
타고난 승부사=당내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한 고이즈미가 ‘장수할’ 수 있었던 최대 비결은 뛰어난 이미지 정치에 있다. 특히 입지 선정이 절묘했다. 그는 집권당 총재이면서도 “자민당을 부수겠다”고 공언하며 야당처럼 행동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집권 내내 저항세력을 악역으로 내세워 ‘싸우는 총리’의 모습을 연출했다. 한 정치 평론가는 “고이즈미와 당내 반대파의 다툼은 내분”이라며 “그럼에도 국민들은 고이즈미의 승리에서 낡은 자민당 정치를 무너뜨린 ‘유사 정권교체’의 만족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대중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와 결정적 순간에 승부수를 던져 상황을 반전시키는 정치적 후각은 탁월하다. 지난해 8월 우정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자폭해산’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총선을 치러 압승을 거둔 것이 대표적이다.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단호한 태도나 짧은 문장을 구사하는 단순 화법, 예상을 깨는 ‘깜짝 인사’는 국민 정서에 호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아베 지지에 앞장서온 <산케이신문>은 지난 9일 아베 등 총재 후보들의 첫 거리유세를 지켜본 뒤 “살기라고 해도 좋은 만한” 2001년 고이즈미 열풍에는 한참 못미친다고 평했다.
개혁의 명암=거품꺼진 일본 경제의 고질병은 막대한 부실채권이었다. 이 문제를 해소해 일본 경제가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고이즈미다. 민간 경제학자를 금융정책의 사령탑으로 과감히 발탁해, 2002년 8% 대였던 주요 은행들의 부실채권 비율을 3년내 절반으로 줄이도록 밀어붙였다. 세계 경제가 호전되는 등 운도 따랐다.
그렇지만 ‘불도저식’ 부실 떨어내기가 금융기관의 체질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디플레이션을 심화시켜 한때 주가가 거품경제 뒤 최저치로 떨어지는 홍역을 앓기도 했다. 이후 현실주의 노선으로 궤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정민영화에 버금가는 업적인 도로공단 민영화는 ‘쓸데없는 도로는 만들지 않는다’는 원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한 상태다. 소비세 인상과 같은 껄끄러운 과제는 다음 정권으로 넘겼다. 무엇보다 그의 신자유주의식 개혁몰이와 규제완화는 일본 사회의 양극화를 가중시킨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외교를 싸움으로=고이즈미의 최대 실정으로는 고집을 앞세우느라 국익을 뒷전으로 미룬 점이 꼽힌다.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끝까지 강행해 일본의 아시아 외교를 사실상 붕괴시켰다. 한·중의 반발로 일본은 숙원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주요 현안에서 발언권이 크게 약화됐다. 그는 동북아에서 갈등의 골이 한층 깊게 패이게 하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고이즈미 외교는 고집불통과 포퓰리즘의 합작품이다. 주변국을 반대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수법은 극장식 국내정치의 재판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외교를 싸움으로 만들었다”는 총체적 평가를 내놓았다. 고이즈미는 주변국과 틀어질수록 친미로 치달았다. 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최고의 밀월을 구가했으며, 최초로 육상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단행해 미-일 동맹의 세계화를 꾀했다. 대미 추종으로 비판받는 그는 미-일 관계가 긴밀하면 아시아 나라들과의 관계도 좋아진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북한을 두 차례나 방문하는 등 북-일 외교에서 일관된 대화 의지를 보인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고이즈미의 높은 인기로 인해 퇴임 뒤 총리 ‘재등판’ 설도 끊이지 않는다. ‘퇴진의 미학’을 추구하는 그의 개성에 비춰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고이즈미 집권기간 변화
외교를 싸움으로=고이즈미의 최대 실정으로는 고집을 앞세우느라 국익을 뒷전으로 미룬 점이 꼽힌다.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끝까지 강행해 일본의 아시아 외교를 사실상 붕괴시켰다. 한·중의 반발로 일본은 숙원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주요 현안에서 발언권이 크게 약화됐다. 그는 동북아에서 갈등의 골이 한층 깊게 패이게 하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고이즈미 외교는 고집불통과 포퓰리즘의 합작품이다. 주변국을 반대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수법은 극장식 국내정치의 재판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외교를 싸움으로 만들었다”는 총체적 평가를 내놓았다. 고이즈미는 주변국과 틀어질수록 친미로 치달았다. 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최고의 밀월을 구가했으며, 최초로 육상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단행해 미-일 동맹의 세계화를 꾀했다. 대미 추종으로 비판받는 그는 미-일 관계가 긴밀하면 아시아 나라들과의 관계도 좋아진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북한을 두 차례나 방문하는 등 북-일 외교에서 일관된 대화 의지를 보인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고이즈미의 높은 인기로 인해 퇴임 뒤 총리 ‘재등판’ 설도 끊이지 않는다. ‘퇴진의 미학’을 추구하는 그의 개성에 비춰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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