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신청을 돕기 위해 비영리법인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정사씨는 “고초를 겪은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커서, 재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는 분이 꽤 있다”고 전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재일동포 간첩사건 재심 운동 김정사씨
재일동포 간첩사건 재심 운동 김정사씨
자신을 알기위해 온 서울대유학 두달만에 체포이유도 모른채 끌려가 모진 고문끝에 간첩누명진실화해위서 조작사건으로 결론…재심 진행중
간첩 조작된 재일동포 160명 누구도 근거 없어‘재심·원상회복 모임’ 만들어 규명·보상 매달려“한국인들, 억울한 동포들 삶에 관심 기울여야”
그의 걸음걸이는 아주 위태롭다.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발을 떼는 모습은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나게 한다. 김정사(56·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위한 모임 이사장)씨는 8년 전부터 양쪽 다리의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차 마비가 심해져 지난해 4월엔 집 계단에서 떨어져 왼팔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발이 굳는 것을 막기 위해 투여하는 근이완제의 양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병원에선 원인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고 했다. 이대로 근육이 약해지면 결국엔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생각에는 1977년 보안사에 잡혀가 조사받는 동안 몽둥이로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 원인이다.
그는 이른바 ‘재일동포 간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법원의 최종판결로 보면 그렇다. 1955년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난 그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지 두달 만에 보안사에 끌려갔고,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되었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2년간 옥살이를 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의 사건을 재조사했다. 그리고 “장기간 불법구금돼 조사받으면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처벌받게 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에 갔는가?
“아버지는 사이타마현의 민단 지단장을 지냈다. 건설업을 하셔서 재력도 있었다. 나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그래서 재일동포라고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속엔 괴로움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한국에 간 적이 있다. 첫인상은 아주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던 우리 역사를 알고는 일본인에 대해 심한 적개심이 들었다. ‘조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모조리 사서 읽었다. 와세다대학에 합격했지만, 그 괴로움을 풀기 위해, 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간 것이다. 서울에 가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만 했다. 우리말을 빨리 익히려고 의식적으로 재일동포들과도 만나지 않았다.”
-1977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는데, 두 달도 안 돼 구속됐다.
“오전 7시 반께였다. 왜 잡혀가는지도 모른 채 하숙집에서 끌려갔다. 수갑을 채우더니 ‘너 이북에 몇번 갔다 왔냐’고부터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지하 법정투쟁기와 <민족시보>(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기관지) 복사본을 다른 재일동포 유학생에게 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 사람을 수사하다가 집에서 그 자료가 나와 나도 끌려간 것이었다. ”
-그것만으로 간첩 혐의가 덧씌워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한달간 물고문, 전기고문을 수도 없이 당했다. 하루는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라고 묻더라. 거기서 고문하다 죽으면 그냥 떨어뜨리는데, 곧장 한강으로 떠내려가게 되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한 강연회에서 임계성이란 사람을 만나 인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부풀려졌다. 그 사람에게 한민통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는 한민통 간부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안사는 임씨가 이적단체인 한민통 간부라며, 나를 그에게 포섭된 ‘간첩’으로 몰아갔다. 결국 한달 만에 눈물을 흘리며 조작된 내용을 담은 조서에 서명했다. 서대문구치소로 옮기고 나니 김지하 시인, 고은 시인, 리영희 선생님 등이 다 있었다. 검찰에 가서 ‘아니다’고 했더니, 검사가 뺨을 때리더라. 법정에서도 고문 때문에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신데, 그때 고문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루는 수사관이 ‘김지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바보였지. 대개는 흔적이 안 남게 고문하는데, 그날은 엎드리라더니 몽둥이로 허벅지에서 등까지 마구 두들겨 팼다. 기절은 안 했지만 정말 너무 아팠다. 얼굴도 맞아 고막도 터졌다. 열흘간 화장실에 앉지도 못했다. 그때 척추를 다친 것 같다. 의사 얘기로는 하체 운동신경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15만명에 1명 정도 있는 증상이라고 한다.” -당신 사건에서, 훗날 전두환 신군부가 당시 재야 정치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만들어졌다. “내 재판은 당시 일본에서 결성돼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단체로 규정짓기 위한 재판이었다고 본다. 내 재판에서 한민통은 이적단체라는 판결이 나왔다. 전두환 신군부는 나중에 한민통이 의장으로 추대한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2년4개월간 옥살이를 했는데, 다른 재일동포 정치범에 견줘보면 석방이 빨랐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아버지가 손을 많이 썼다. 한국 정보기관 최고위 간부에게 당시 돈으로 현금 6000만엔을 줬다는 얘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 8년 뒤 아버지가 경희대 병원에 입원하시게 돼 서울에 가게 됐는데, 정보기관의 간부가 아버지한테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더라. 아버지가 일본 자민당 쪽에도 많은 돈을 댄 것 같다. 일본 참의원 의장이 8월14일 서울에 가서 내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내 재판을 통해 한민통을 이적단체로 이미 규정했으니, 나는 더 이용가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79년 광복절 특사로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 16명이 풀려날 때 함께 풀려나왔다. 그해에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한국에서 옥살이를 한 재일동포들은 특별영주자(옛 협정영주자) 지위를 잃었다고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재입국 허가 기한인 1년 이내에 귀국하지 못해 특별영주자 지위를 잃었다. 지금은 일반영주자로 외국에 나갔다 들어올 때 외국인처럼 지문을 날인하고 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다.” -한국에 남겠다는 생각은 없었나? “그런 마음도 있었다. 대학에 복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사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징역 10년으로 줄어들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독재정권은 오래 못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맘이 편했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를 너무 힘들게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김정사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에 연행돼 장기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수사관들에게 구타·물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해 이를 견디지 못해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행위를 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자백했다는 게 요지다.” -현재 재심이 진행중이다. “내 경우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사건이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재심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지난해 1월 신청을 했는데, 올 3월에야 재심이 받아들여졌다. 충실하게 심리가 이뤄져 당시 법원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한 판결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위한 모임’은 어떻게 만든 것인가? “재일 한국인들이 한국에 가서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을 때부터 30년간 구명운동을 해온 분들과 함께 만들었다. 날조된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진상을 밝혀 피해자의 인권을 구제하고 보상을 받게 하자는 게 목적이다. 법적 지위가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특정비영리법인으로 설립했다. 작년 8월에 신청을 해서 최근에 인증을 받았다. 지금은 회사 일은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재일동포로서 간첩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재일동포만으로 보면 160명 정도다. 관련된 한국인을 포함하면 250명가량 된다.” -왜 이렇게 많은가? “일본 동포단체로 민단과 총련이 갈려 있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미워하고, 북한에 동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북에 다녀온 사람도 많았다. 사회주의 서적도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일본의 지각있는 고등학생으로 마르크스주의 책을 안 읽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간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웠던 것 같다. 그때는 간첩을 체포하면 특진을 하는 등 큰 보상을 받았다. 당시 시대 상황을 연구한 사람 얘기로는, 1960년대엔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많았는데, 1970년대 들어 없어졌다. 그러면서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들은 대체로 옥살이 기간도 길었다. “별거 아닌 일로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 8명이다. 나야 아버지 도움으로 빨리 석방됐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풀어주지도 않았다. 국내에 가족이 없어 항의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가 억울한 사람들이라고 보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간첩이 그렇게 쉽게 되겠나?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씨의 경우 검사가 북한에 갔다고 주장한 날 구마모토의 백화점에서 산 시계 보증서를 갖고 있었다. 당시 법원에서도 얘기했고, 구마모토현 경찰이 직접 확인도 했다. 그럼에도 유죄가 됐다. 나는 긴급조치 위반 행위는 있어도, 실제 간첩행위를 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처럼 대부분 고문으로 조작됐다고 본다.” -인생을 빼앗긴 꼴인데…. “나는 옥살이한 것에 대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의 흠이 아니라 훈장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연루된 분들 가운데는 그걸 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당연하다. 모든 걸 다 빼앗겼으니까. 그나마 재심이라도 해서, 그분들이 무죄선고를 받고 경제적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좋은 직장은 상상하기 어렵고,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어렵다.” -한국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재일동포 간첩 날조사건을 모른다는 것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본다. 모르면 죄다. 알아야 한다. 그 일로 지금도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잡아다가 고문해서 인생을 망가뜨리고, 폐인으로 만들었다. 다들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갔을 뿐인데, 그게 죄인가? 설령 북에 가서 형제를 만나고 왔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나는 정말 내 나라가 그리웠다. 진짜 가고 싶었다. 내 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라를 사랑한 게 죄라면, 그건 인정하겠다.” -일본에서 재심 신청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세 분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외 7명이 재심이 진행중이다. 최근에 많은 분들이 재심 신청을 하고 있다. 이석태 변호사 등 다섯 분이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변호를 해주고 계신다. 본인들의 돈을 들여 일본에 자주 와서 설명회도 해주신다.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연락이 되는 분이 40명가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잊으려고 너무 애쓰신 탓인지 옛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인터뷰/ 글·사진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그것만으로 간첩 혐의가 덧씌워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한달간 물고문, 전기고문을 수도 없이 당했다. 하루는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라고 묻더라. 거기서 고문하다 죽으면 그냥 떨어뜨리는데, 곧장 한강으로 떠내려가게 되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한 강연회에서 임계성이란 사람을 만나 인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부풀려졌다. 그 사람에게 한민통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는 한민통 간부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안사는 임씨가 이적단체인 한민통 간부라며, 나를 그에게 포섭된 ‘간첩’으로 몰아갔다. 결국 한달 만에 눈물을 흘리며 조작된 내용을 담은 조서에 서명했다. 서대문구치소로 옮기고 나니 김지하 시인, 고은 시인, 리영희 선생님 등이 다 있었다. 검찰에 가서 ‘아니다’고 했더니, 검사가 뺨을 때리더라. 법정에서도 고문 때문에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신데, 그때 고문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루는 수사관이 ‘김지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바보였지. 대개는 흔적이 안 남게 고문하는데, 그날은 엎드리라더니 몽둥이로 허벅지에서 등까지 마구 두들겨 팼다. 기절은 안 했지만 정말 너무 아팠다. 얼굴도 맞아 고막도 터졌다. 열흘간 화장실에 앉지도 못했다. 그때 척추를 다친 것 같다. 의사 얘기로는 하체 운동신경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15만명에 1명 정도 있는 증상이라고 한다.” -당신 사건에서, 훗날 전두환 신군부가 당시 재야 정치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만들어졌다. “내 재판은 당시 일본에서 결성돼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단체로 규정짓기 위한 재판이었다고 본다. 내 재판에서 한민통은 이적단체라는 판결이 나왔다. 전두환 신군부는 나중에 한민통이 의장으로 추대한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2년4개월간 옥살이를 했는데, 다른 재일동포 정치범에 견줘보면 석방이 빨랐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아버지가 손을 많이 썼다. 한국 정보기관 최고위 간부에게 당시 돈으로 현금 6000만엔을 줬다는 얘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 8년 뒤 아버지가 경희대 병원에 입원하시게 돼 서울에 가게 됐는데, 정보기관의 간부가 아버지한테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하더라. 아버지가 일본 자민당 쪽에도 많은 돈을 댄 것 같다. 일본 참의원 의장이 8월14일 서울에 가서 내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내 재판을 통해 한민통을 이적단체로 이미 규정했으니, 나는 더 이용가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79년 광복절 특사로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 16명이 풀려날 때 함께 풀려나왔다. 그해에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한국에서 옥살이를 한 재일동포들은 특별영주자(옛 협정영주자) 지위를 잃었다고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재입국 허가 기한인 1년 이내에 귀국하지 못해 특별영주자 지위를 잃었다. 지금은 일반영주자로 외국에 나갔다 들어올 때 외국인처럼 지문을 날인하고 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다.” -한국에 남겠다는 생각은 없었나? “그런 마음도 있었다. 대학에 복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사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징역 10년으로 줄어들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독재정권은 오래 못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맘이 편했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를 너무 힘들게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김정사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에 연행돼 장기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수사관들에게 구타·물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해 이를 견디지 못해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행위를 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자백했다는 게 요지다.” -현재 재심이 진행중이다. “내 경우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사건이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재심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지난해 1월 신청을 했는데, 올 3월에야 재심이 받아들여졌다. 충실하게 심리가 이뤄져 당시 법원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한 판결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위한 모임’은 어떻게 만든 것인가? “재일 한국인들이 한국에 가서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을 때부터 30년간 구명운동을 해온 분들과 함께 만들었다. 날조된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진상을 밝혀 피해자의 인권을 구제하고 보상을 받게 하자는 게 목적이다. 법적 지위가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특정비영리법인으로 설립했다. 작년 8월에 신청을 해서 최근에 인증을 받았다. 지금은 회사 일은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재일동포로서 간첩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재일동포만으로 보면 160명 정도다. 관련된 한국인을 포함하면 250명가량 된다.” -왜 이렇게 많은가? “일본 동포단체로 민단과 총련이 갈려 있다. 1970년대에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미워하고, 북한에 동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북에 다녀온 사람도 많았다. 사회주의 서적도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일본의 지각있는 고등학생으로 마르크스주의 책을 안 읽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간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웠던 것 같다. 그때는 간첩을 체포하면 특진을 하는 등 큰 보상을 받았다. 당시 시대 상황을 연구한 사람 얘기로는, 1960년대엔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많았는데, 1970년대 들어 없어졌다. 그러면서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 연루자들은 대체로 옥살이 기간도 길었다. “별거 아닌 일로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 8명이다. 나야 아버지 도움으로 빨리 석방됐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풀어주지도 않았다. 국내에 가족이 없어 항의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가 억울한 사람들이라고 보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간첩이 그렇게 쉽게 되겠나?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씨의 경우 검사가 북한에 갔다고 주장한 날 구마모토의 백화점에서 산 시계 보증서를 갖고 있었다. 당시 법원에서도 얘기했고, 구마모토현 경찰이 직접 확인도 했다. 그럼에도 유죄가 됐다. 나는 긴급조치 위반 행위는 있어도, 실제 간첩행위를 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처럼 대부분 고문으로 조작됐다고 본다.” -인생을 빼앗긴 꼴인데…. “나는 옥살이한 것에 대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의 흠이 아니라 훈장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연루된 분들 가운데는 그걸 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당연하다. 모든 걸 다 빼앗겼으니까. 그나마 재심이라도 해서, 그분들이 무죄선고를 받고 경제적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좋은 직장은 상상하기 어렵고,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어렵다.” -한국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재일동포 간첩 날조사건을 모른다는 것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본다. 모르면 죄다. 알아야 한다. 그 일로 지금도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잡아다가 고문해서 인생을 망가뜨리고, 폐인으로 만들었다. 다들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갔을 뿐인데, 그게 죄인가? 설령 북에 가서 형제를 만나고 왔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나는 정말 내 나라가 그리웠다. 진짜 가고 싶었다. 내 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라를 사랑한 게 죄라면, 그건 인정하겠다.” -일본에서 재심 신청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세 분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외 7명이 재심이 진행중이다. 최근에 많은 분들이 재심 신청을 하고 있다. 이석태 변호사 등 다섯 분이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변호를 해주고 계신다. 본인들의 돈을 들여 일본에 자주 와서 설명회도 해주신다.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연락이 되는 분이 40명가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잊으려고 너무 애쓰신 탓인지 옛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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