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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군부의 폭주에서 야스쿠니 신사 공동체로

등록 2012-08-10 21:36수정 2012-08-10 22:21

[토요판] 커버스토리
천황과 우익
일본 천황의 근원을 찾아가자면 옛 일본 문헌 속에 등장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카미(오미카미)에서부터 ‘백제 도래민설’까지 전설과 고고학을 넘나드는 간단치 않은 토론을 거듭해야 하지만,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 의미 있는 주체로 영향력을 갖게 된 시기는 메이지 유신(1868)을 전후한 시기라고 보면 된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국가를 만들려 했던 일본은 당시 세계 조류에 따라 성문화된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 1882년 세계 각국의 헌법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가 맞닥뜨린 가장 큰 난제는 천황을 근대적인 성문법 체계 속에 어떻게 위치 지을까 하는 것이었다. 초안 작성에 나선 법제국 관료 이노우에 고와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천황이 일본 역사에서 어떤 위치였는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초대 진무 천황(기원전 660년 즉위)으로부터 현재 메이지 천황까지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천황가의 순수한 혈통이었다. 그래서 1889년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의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것을 통치한다”로 정해졌고, 11조에서는 “천황이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못박아 군에 대한 통수권을 갖는 것은 오로지 천황뿐임을 명문화했다. 그러면서도 4조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헌법의 조문에 의해 이를 시행한다”고 정해 일본이 천황 개인의 독단이 아닌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입헌군주국임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역사가 증명하듯 천황의 절대권을 강조한 헌법 1·11조와 천황의 지배도 법률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4조는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황의 뜻과 의회의 뜻을 둘러싼 긴장
헌법 제정 이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을 일으켜 대만과 조선을 병합하는 등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면서도 국내적으로는 25살 이상의 남성을 대상으로 보통선거를 실시(1925년)하는 등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갖춰간다. 그렇다면 천황의 뜻이 우선일까,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된 의회의 뜻이 우선일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둘 사이의 긴장이 폭발한 계기는 1930년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둘러싸고 터진 ‘통수권 논란’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해군의 보유 함선 수가 제한을 받게 되자 일본의 우익들은 “정부가 군에 대한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했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조약 추진의 책임자였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우익들의 총격을 받아 쓰러졌고, 이후 등장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도 관동군이 상부의 허가 없이 저지른 만주사변(1931년 9월)의 승인을 거부하다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게 참살당한다. 천황의 통수권을 명분으로 누구로부터도 감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군부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 사회를 테러의 수렁으로 몰고 간 천황절대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1910년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우에스기 신키치였다. 그는 천황은 곧 일본이기 때문에 일본은 당연히 그의 뜻을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천황주권설’을 주장했다. 그런 우에스기와 대립한 이가 천황도 국가의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천황기관설’을 내세운 미노베 다쓰키치였다. 1910년대 도쿄제국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된 둘 사이의 학술적인 논쟁에서는 미노베가 압승을 거뒀지만,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우에스기의 제자들은 일곱번 고쳐 죽어도 천황을 위해 살겠다는 ‘시치세이샤’를 만들어 1932년 사회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혈맹단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미노베의 책 출판이 금지됐고, 1936년 2월엔 우익들이 직접 나서 그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미노베가 공격을 당한 지 5일이 지난 2월26일 ‘쇼와유신·존황토간’(쇼와 유신을 단행하고, 황제를 떠받들며, 역적을 토벌하자)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청년 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는 진압됐지만, 더 이상 누구도 군부와 우익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게 됐다.

천황 절대주의는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신도와 결합해 야스쿠니 사상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죽어서 야스쿠니의 신이 되어 만나자”며 자살공격에 뛰어들었고,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는 태평양의 섬들마다 이들의 집단 자결이 이어졌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절대불멸이며 어떤 상대와 싸우더라도 반드시 승리한다는 천황 절대주의는 자국민들과 주변 여러 나라들한테 씻기 힘든 커다란 고통을 남긴 채 파국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천황은 1946년 1월1일 관보에 실린 ‘인간선언’으로 신에서 인간의 지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미군정 치하인 1946년 11월3일 새 헌법이 탄생했다. 새 헌법에서 천황의 지위는 일본을 통치하는 국가원수에서 “일본국의 상징으로 그 위치는 국민의 총의에 의해 결정”(1조)되는 상징 천황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책임에서 해방된 천황은 평화의 상징으로 변해 많은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존재로 안착에 성공했다.

전쟁 전 천황과 일본의 우익을 연결한 핵심 축이 군부였다면, 지금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천황을 위해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시설인 야스쿠니신사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남편이나 아버지를 기리는 유족들의 소박한 정서는 시간이 흐르며 ‘태평양전쟁은 올바른 전쟁이었다’는 우익들의 세계관과 절묘한 화학적 결합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구실을 하게 되는 인물이 전쟁 전 대장성 대신을 역임한 A급 전범 가야 오키노리였다. 그가 일본유족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유족회는 정부가 직접 야스쿠니신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야스쿠니신사 국가 호지(護持) 요강’을 발표했고, 그 뒤로는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를 요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천황절대주의에 큰 영향 끼친
도쿄제국대 교수 우에스기
미노베와의 논쟁에서 졌지만
제자들은 암살로 반대편 제압

자민당-유족회-신사 포괄하는
전후 일본 우익의 공동체
자민당 의원들이 유족들에게
사회보장제도 만들어주면
그 돈의 일부가 신사로

저명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
전후 일본인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천황절대주의자를 꼽자면 아마도 일본의 저명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될 것이다. 그는 1970년 11월25일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방패회’ 회원들과 함께 도쿄 시내 이치가야에 있는 자위대 본부를 점거한 뒤 “남의 나라가 멋대로 제정한 현행 헌법 따위는 걷어치우자”고 절규하면서 궐기를 선동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현장에서 할복자살을 해 마흔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만들었다는 방패회의 방패는 천황을 지키기 위한 방패(전쟁 전 일본 육사 생도들은 스스로를 ‘천황의 방패’라 불렀다)이고, 그가 개정해야 한다는 헌법의 조문은 천황을 일본의 통수권자에서 상징으로 격하시킨 헌법 1조와 군대의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였다. 그가 죽기 전 자위대원들을 향해 남긴 연설을 들어 보면, 일본 우익들이 천황에 대해 품고 있는 기묘한 정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자위대가 들고일어나길 기다렸다. 이래서는 더 이상 헌법 개정의 기회가 없다. 자위대가 군대가 되는 날은 오지 않는다. 자위대를 만든 참뜻이 뭔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겠지. 일본을 지키는 것이란 무엇인가? 천황을 중심에 놓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후 일본 우익은 자민당(권력), 일본유족회(표), 야스쿠니신사(이데올로기)를 포괄하는 거대한 운명 공동체로 기능해 왔다. 자민당 의원들이 유족들에게 다양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주면, 유족은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야스쿠니신사에 헌금을 낸다. 돈의 흐름은 일본 정부(후생노동성)→유족회→야스쿠니신사이고, 표는 그 역방향인 유족회→자민당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82·83대 총리를 지낸 하시모토 류타로는 후생대신과 유족회장을 거쳐 일본의 총리 자리에 올랐고, 87·88·89대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유족회장은 아니었지만 후생대신을 두 차례 지내는 등 유족들과 가까운 정치인이었다. 고이즈미가 주변국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데에는 그가 주장한 ‘마음의 자유’ 말고도 지지율 끌어올리기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가 이끌었던 자민당이 2009년 8월 총선에서 참패한 데서 볼 수 있듯 주변국들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흐름은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그 대신 최근에는 영토 주권과 이를 지키기 위한 군대 보유를 주장하는 흐름이 지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익 정치가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다. 그는 최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도쿄도가 사들이겠다고 밝혀 결국 국가의 국유화 방침을 이끌어 냈다. 자민당, 민주당 정부를 가리지 않고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이나 헌법 9조 개정에 대해서는 아직 신중한 의견이 많지만, <요미우리신문>의 7월 조사를 보면 센카쿠열도 국유화 주장에 대해선 일본 국민 가운데 65%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 5월24일 일본 중의원에서는 국회에서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검토해 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헌법심사회가 첫 모임을 열었다. 첫 주제는 일본 헌법 1조에 명기된 상징 천황 조항이었다. 이날 자민당은 “헌법을 개정해 천황을 원수라고 대외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여당인 민주당은 “현재 당내에 정리된 의견은 없다”는 중립적인 입장을 밝혔다. 현재 일본 헌법이 천황의 이름 아래 일본이 저지른 지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과거에 대한 성찰 없이 진행되는 최근의 논의는 무척이나 위태롭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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