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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본은 ‘천황 폐하 만세’를 다시 부르기 원하나

등록 2012-08-10 21:49수정 2012-08-12 15:41

[토요판] 커버스토리 천황의 부활
“국가원수로” 자민당의 개헌 추진
왜 그를 다시 정치로 불러내는가
왜 천황을 원수로?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미국 군함에 전투기를 충돌시켜 죽기 직전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세뇌의 결과였다. 천황 숭배는 죄 없는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살육으로, 죽음으로 내몬 이데올로기였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 일본의 보수세력이 헌법을 고쳐 그 천황을 다시 ‘일본의 국가원수’로규정하겠다고 한다. 무슨 의도일까?

“천황을 일본의 국가원수로 규정한다.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한다. 자위권과 국방군의 보유를 명시한다.”

일본의 보수 주류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자민당이 지난 4월 확정한 헌법 개정안 초안의 핵심 내용이다. 자민당은 8월15일 전에 이런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포함한 차기 중의원 선거 공약을 확정짓겠다고 밝혔다.

이는 현행 헌법이 정한 일본 국가의 틀을 뿌리까지 바꾸겠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천황을 ‘국가원수이고, 입법권과 조약체결권, 군통수권을 가진 절대존재’(제국헌법)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끌어내린 이 조항과, ‘교전권을 부인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제9조를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는 현행 헌법은 1947년 5월3일 시행한 이래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자민당 안대로 일본 헌법이 바뀌면, 일본은 다시 ‘천황의 나라, 천황의 군대를 보유한 나라’로 돌아간다. 천황의 군대는 일본이 직접 침략당하지 않더라도, 동맹국의 교전에 참가할 수도 있게 된다.

“주권국가로서 헌법도 자주적으로 개정을”

일본에서 헌법 개정은 오랜 동안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국민투표 절차를 규정한 법조차 없었다. 보수화가 진척된 최근 10여년 사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국민투표법은 2010년 5월 시행에 들어갔다. 일본 국회는 양원에 헌법 개정 문제를 다룰 헌법심사회를 지난해 9월 구성했다. 비록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재적 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개헌이 더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게 됐다. 자민당은 “일본이 연합국의 지배를 벗어나 주권을 회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한 지 이제 60년을 맞았다”며 “점령체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을 주권국가에 어울리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헌법을 자주적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민당의 이런 헌법 개정론은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습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서도 왕을 국가원수로 명시적으로 헌법에 규정한 나라는 이제 스페인, 스웨덴, 리히텐슈타인 3개국밖에 남지 않았다. 천황의 군대에 짓밟혔던 동아시아 주변국들은 과거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일본의 변화를 강력히 경계한다. 도대체 일본 보수파는 무슨 생각으로 이를 추진하는 것인가?

아키히토 지지도 상승
정치·사회적 우경화 틈타
과거사의 짐 털어내고
자위대 활동범위 넓혀온
그동안 노력 일단락짓기 원해

‘상징 천황제’ 바꾸는 데
현재의 여론은 매우 부정적
왕실도 현행 헌법 아래 지위가
전통에 부합한다고 생각

일본의 전통에서 천황은 서양의 왕이나 황제와는 꽤 다른 존재다. 메이지 왕의 고손자인 헌법학자 다케다 쓰네야스(37·게이오대학 강사)는 “천황은 일본의 ‘제사장’으로 쇼군(무사권력의 최고권력자)이나 국왕을 초월하는 존재였다”고 말한다. 그는 “천황이 일본을 다스린다는 것은 직접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나라의 사정을 들어 국민과 나라를 통합해간다는 의미”라며 “일본에서는 서양에서처럼 군주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일본은 왜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가?>)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일본 근대사에서 천황의 실제 모습은 이와 달랐다.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천황의 권위는 일본의 신민이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저지르는 악행들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히로히토 왕은 절대권력을 갖고 전쟁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에 소년지원병으로 참전했던 와타나베 기요시(1925~81)는 당시의 경험을 담은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천황이 어떻게 전쟁을 주도했는지, 천황의 이름으로 어떤 잔혹한 짓이 벌어졌는지를 고발했다.

천황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사실상 미국)의 정치적 고려로 전쟁책임을 지지 않은 채, ‘상징 천황’으로 모습을 바꾸고 살아남았다. 우익은 ‘천황(히로히토)은 군부의 로봇이었을 뿐 전쟁에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평화주의자였다’는 식으로 이미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1947년 일본 헌법 시행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을까?

왕실에 부정적 기사 쓰면 우익들이 소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문화연구소는 1973년부터 5년마다 여론조사를 벌이면서, 그 안에 천황에 대한 감정을 묻는 질문을 담아왔다. 이를 보면, ‘존경한다’는 대답은 1973년 33%에서 2003년 20%로 줄어들었다. 이는 천황에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3년 조사에서 193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42%가 ‘존경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1939~1958년 출생 세대는 19%, 1959년 이후 세대에서는 8%에 머물렀다. <일본의 전쟁책임> 등을 쓴 공화주의 저술가 와카쓰키 야스오(88)는 이를 두고 “일본의 천황제는 소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2005년 쓴 한 논문에서 주장한 바 있다. 존경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국가의 상징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감’을 느낀다는 대답이 많아진 것은 주목된다. 1988년 조사에서 호감을 느낀다는 대답은 22%에 그쳤으나, 아키히토 왕이 즉위한 뒤인 1993년 조사에서는 43%, 2003년 조사에서는 41%가 호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가장 최근인 2008년 조사에서는 호감이 7%포인트 줄어든 대신, 존경이 5%포인트 늘어나 호감이 존경으로 일부 바뀌는 모습도 나타났다.

“지금 조사하면 존경이나 호감을 갖는다는 비율이 훨씬 더 높을 것입니다. 저도 호감을 갖게 됐으니까요.” 지난 5일 도쿄의 왕궁(황거) 앞에서 만난 대학생 다나카 겐지(22)는 “지난해 3·11 대지진을 겪은 뒤, 천황과 왕실이 보여준 행보를 보면 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왕은 지진이 일어난 지 닷새 뒤인 3월16일 “재해를 입은 분들, 결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대국민 비디오 메시지를 발표했다. 천황이 직접 방송에 나와 국민에게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은 1945년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이후 처음이었다.

이후 천황 부부는 노구를 이끌고 재해지역을 8월 말까지 8차례 방문해 사람들을 위로했다. 78살의 왕은 이재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인자한 얼굴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재민이 왕비의 가슴에 안겨 우는 모습도 텔레비전 카메라에 비쳤다. 지난 2월18일 왕이 협심증 치료를 받기 위해 도쿄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왕궁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섰다. 2월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왕궁 정문인 사카시타문 앞에 설치한 특별 기장소(문병의 글을 남기는 곳)에 수술의 성공을 빌기 위해 다녀간 사람이 2만명이 넘었다.

물론 천황의 이미지는 국가에 의해 잘 관리돼온 것이다.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 기자클럽의 가맹사는 중앙 일간지와 방송사 몇개로 제한돼 있다. 부정적인 정보에는 언론도 아예 접근이 안 된다. 한 일간지 기자는 “왕실에 부정적인 기사를 쓰면 우익들이 항의전화를 하는 등 소란을 피우기 때문에 주류 언론은 비판적인 보도를 피해왔다”고 말했다.

우익들은 천황에 부정적인 세력들을 폭력으로 억누르기도 한다. 지난 3월18일 도쿄 신주쿠에서는 ‘반안보실행위원회’ 등 반전단체들이 모여 ‘그러니까 전쟁 반대를’이라는 제목의 집회를 열고 거리행진을 벌였다. 이곳에 수십대의 선전차를 앞세우고 우익들이 덮쳐 펼침막을 뺏고 기물을 부수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후미히토 왕자 “왕에게도 정년 있어야”

그러나 우익의 오랜 노력에도, 여론은 현재의 ‘상징천황제’를 바꾸는 데는 매우 부정적이다. 아키히토 왕 즉위 20년을 맞아 <엔에이치케이>가 2009년 말 조사한 것을 보면, 지금의 왕실이 헌법이 정한 상징으로서 구실을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48%가 ‘매우 그렇다’, 37%가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천황제의 앞날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상징으로 있는 것이 좋다’가 82%에 이르렀다.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대답은 8%, 정치적 권한을 줘야 한다는 대답은 6%에 각각 그쳤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 우파가 천황을 ‘국가원수’로 헌법에 규정하겠다는 의도는 무엇일까? 학자들 사이에선 ‘헌법에 명문 규정이 없어도 천황은 일본의 국가원수’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헌법에 명문 규정을 두는 것은 보수파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입김 아래 제정된 헌법을 일본인의 뜻에 따라 다시 만들었음을 잘 부각’시킬 수 있는 길이다. 일본의 보수파들은 그동안 제국주의 침략이란 과거사의 짐을 점차 털어내고, 헌법 해석을 바꿔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정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확산은 바로 그런 흐름을 반영한다. 보수파들은 또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합법화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애써왔다. 그런 가운데 일본 사회엔 배외주의의 분위기가 퍼지고, 보수파들은 여야 정치권 안에서 힘을 키워가고 있다. 도쿄도 지사를 4연임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보수파들은 ‘천황의 군대’를 합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그동안의 노력을 일단락짓고 싶어한다.

이영채 게이센여자대학 교수(정치학)는 “일본 국민들이 국가 위기라는 느낌을 갖고 있지만 국가의 중심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파가 천황을 상징적 존재에서 정치적 존재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런다고 해서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갖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이를 보수 우익이 점차 이용하게 될 것이 걱정스럽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1933년생인 아키히토 왕은 올해 만 78살이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했고, 올해 들어선 심장 수술을 했다. 그의 차남인 후미히토(아키시노노미야) 왕자는 지난해 말 “왕이 공무를 맡는 데도 정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일본 정부는 왕의 후계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공주가 결혼해도 왕실의 일원으로 계속 남아 만일의 경우 왕위를 잇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모두가 아키히토의 시대가 저물고 새 천황의 시대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천황의 지위와 구실에 대한, 나루히토 왕세자의 생각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아키히토는 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상징천황제가 일본의 오랜 전통에 더 부합한다는 왕실의 생각은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보려는 우파들에게는 오히려 벽이 될 것 같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천황 일본은 7세기 무렵부터 군주를 천황(天皇·덴노)이라 하였다. 그 전에는 ‘대왕’, ‘천왕’ 등으로 호칭을 썼다. 중국 당나라 고종이 황제 대신 쓴 ‘천황’이란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 등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일본은 천황을 ‘폐하’라 칭하며 황제와 같은 격으로 대하는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왕’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기사에서는 ‘천황제’를 다루는 까닭에, 일본 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의미로 ‘천황’이란 호칭을 그대로 살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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