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길윤형 특파원
현장에서
며칠 새 내린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이다.
3일 개천절을 맞아 일본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주에 자리한 한국 대사관이 주최한 기념 리셉션에 세계 각국의 귀빈들이 모였다. 이병기 주일 대사가 관저 들머리에 나와 800여명의 각국 정관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행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그런데 귀빈석이 썰렁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한 가이후 도시키 전 일본 총리, 누카가 후쿠시로 한일의원연맹 일본 쪽 회장,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등이 귀빈석을 지켰다. 현재 자민당의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주요 인물은 참석하지 않았다. 사이키 아키타카 외무성 차관이 얼굴을 내민 정도다. 그나마 공동 여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가 나와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양국 정부 간 관계가 개선되도록 연립 여당으로서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게 위안이었다.
최근 일본에선 좀처럼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한-일 관계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지난달 6일 후쿠시마현 등 8개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일본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 하필 도쿄가 뛰어든 2020년 여름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하루 남짓 앞둔 때라 평소 한국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일본인 기자마저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사관 주변에선 “발표를 이틀만 늦췄다면 한국 정부가 일본을 배려해 개최지 결정이 날 때까지 수입금지 결정을 미뤘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여기에 지난달 26일 뉴욕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장물인 쓰시마 간논지의 불상을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거둬들이는 과정을 거치며 일본에선 한국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인식이 짙어지고 있다.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요미우리신문>은 3일 ‘(한국한테) 일한관계 개선의 의사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기도 했다.
이병기 대사는 이날 나빠진 한-일 관계를 언급하며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비 내린 뒤 땅이 저절로 굳어질 리 없다. 그러려면 땅을 고르는 사람의 애씀이 앞서야 한다. 한-일 관계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선이 있기에 정부의 대응을 무턱대고 비판하긴 어렵다. 그러나 한-일 관계를 이대로 방치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과 희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부가 가려 판단하고 있는지, 그저 감정적이거나 국내 정치적 이해득실만 고려해 대응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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