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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원전 추진파였던 고이즈미는 왜 탈원전으로 전향했나

등록 2013-11-14 20:38수정 2013-11-15 15:48

12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일본기자클럽 9층 대회의실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원전 제로’(탈핵)를 강조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6년 퇴임 이후 첫 기자회견을 자청한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방명록에 ‘백고일행’(百考一行·백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행동하는 게 낫다)이라고 썼다.
12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일본기자클럽 9층 대회의실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원전 제로’(탈핵)를 강조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6년 퇴임 이후 첫 기자회견을 자청한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방명록에 ‘백고일행’(百考一行·백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행동하는 게 낫다)이라고 썼다.
[세계 쏙]

일 정치권 ‘태풍의 핵’ 고이즈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득권의 벽에 눌리지 않고, 과거의 경험에 연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눌리지 않고, 연연하지 않는’ 자세를 밀어붙여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진행하겠습니다.”

2001년 5월7일 일본 국회 본회의장. 10여일 전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오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는 이날 국회에서 ‘소신표명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추구해 나갈 정치 노선을 ‘개혁’이라 선언했다. 그의 집권 5년 5개월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겠지만, 그가 ‘한다면 한다’는 의지의 정치가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많지 않다.

총리 시절 방사능폐기물시설 방문
핵연료 처리 건설 문제에 눈뜨고
원전 이익 보는 기득권층에 환멸

원전 반대 부르짖는 ‘민의’ 대변
아베 총리에 탈원전 결단 촉구
‘일본 국민들 55%의 찬성’ 얻어

그 이후 12년이 지난 지금 고이즈미는 다시 한번 일본 정가에서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2011년 3월 끔찍한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뒤, 그가 새롭게 내건 깃발은 다름 아닌 ‘탈핵’이다. 지난 12일 퇴임 이후 7년 만에 처음 연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는 아베 신조 총리를 향해 “즉각 탈핵을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의 유력지들이 이튿날인 13일치 신문에 그의 발언을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마이니치신문>은 아예 고이즈미의 탈핵 주장에 ‘국민 55%가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함께 ‘(아베) 총리는 (고이즈미의 탈핵 주장에) 귀를 기울여 결단을’이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총리 재임 기간 핵 발전 추진파였던 고이즈미는 왜 탈핵으로 전향한 것일까.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8월 핀란드 온카로 방사능 폐기물 최종처분장을 방문한 경험이었다. 수도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배로 20분 떨어진 오지의 섬에 400m 정도 바위를 뚫고 들어가 가로·세로 2㎞짜리 대형 광장을 만든 모습을 보고, 지반이 불안하고 지하수가 많이 나오는 일본에서 이런 시설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주장대로 일본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에서 상업용 핵 발전이 시작된 것은 1966년이다. 그후 반세기 동안 일본 전역에 지어진 핵 발전소에 보관돼 있는 사용후 핵연료의 양은 무려 1만4870t에 이른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예측을 보면, 핵 발전소가 예전처럼 정상 가동하는 경우 각 핵 발전소에 만들어진 핵연료 저장 시설은 7년이면 포화 상태가 된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비해 혼슈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에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공장을 만들었다. 사용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 등을 추출해 부피를 줄인 뒤 여기서 발생한 폐기물을 보관하는 최종 처분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애초 1997년 완공 예정이던 재처리 공장은 지금까지 무려 19번의 사고를 일으킨 끝에 아직도 정상 가동을 못하고 있다.

재처리 공장이 가동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일본은 2000년 관련 법률에 따라 지하 300m 이하의 공간에 10만년 동안 폐기물을 보관할 수 있는 처분장을 건설한다는 기준을 제정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최종 처분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선 지방자치단체는 한 곳도 없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대참사 전에도 후보지를 못 찾았는데, 대참사를 겪고 난 지금 처분장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탈핵을 주장하는 나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고 무책임한 이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정치 이력에서 전향의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다.

1970년 고이즈미는 나중에 일본의 67대 총리가 된 후쿠다 다케오 의원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그의 임무는 후쿠다 의원의 집앞 현관에서 신발을 정리하던 일이었다고 한다. 얼마 뒤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후임 자리를 놓고 그가 모시던 후쿠다 의원과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다. 승자는 다나카 전 총리였다. 이후 총리 자리에 오른 다나카는 국토의 균형 있는 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운 ‘국토개조론’을 제창하며 일본 국토 곳곳에서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인다. 일본 전역에 공공사업을 벌이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을 분배하는 자민당식 ‘금권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후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 “나의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저항세력”이라는 어록을 남기는데, 이때 그가 지목한 기득권층이란 다름 아닌 다나카부터 이어지는 자민당 내 주류 파벌(당시 하시모토파)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핵 발전소 만큼 다나카식 금권 정치의 법칙이 철저히 구현되는 산업도 없다. 핵 발전 업계는 이미 거대 전력회사-핵 발전소 제조사-전문가 그룹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마피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핵 발전소를 유치한 지자체와 주민들도 핵 발전소를 유치한 대가로 국가에서 내려보내는 막대한 교부금에 의존해 살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일본 사회는 핵 발전소 없이도 잘 굴러갔고, 도쿄전력은 심지어 대지진 이후 단행된 전기료 인상 덕분에 올 상반기 1416억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핵 발전소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기득권층이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탈핵 요구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고이즈미의 최근 탈핵 행보의 원인을 2005년 ‘중의원 해산’이라는 강수 끝에 우정 민영화 법안을 통과시킨 경험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12일 기자회견에서 우정민영화의 경험을 몇번이나 되풀이 말하며 “지금은 모든 야당이 원전에 반대하기 때문에 총리가 결단만 하면 된다” “당시에 비하면 정치 환경이 너무 좋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만 결단하면 일본이 탈핵 사회로 나가는 게 가능할 텐데, 이를 결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연일 적극적인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단독 행동’만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진 않다. 일단 비판의 대상이 된 자민당이 꿈쩍하지 않고 있다. 12일 기자회견 직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소신은 인정하지만 정부로서는 책임 있는 에너지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며 기존 태도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민당의 실력자인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도 “원전 의존도를 낮춘다는 방향성은 (고이즈미 총리의 주장과 자민당의 견해가) 서로 같다”는 발언에 그쳤다. 국민적 지지를 받는 고이즈미와 되도록 마찰을 빚지 않으며 현재의 불리한 상황을 넘기겠다는 속셈으로 읽힌다. <아사히신문>도 “아베 정부는 안전성이 확보된 원전은 재가동한다는 방침이고 그에 따라 현재 에너지 기본계획을 작성하고 있어 정부 견해가 바뀌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고이즈미가 아닌 일본인들의 민의다. 실제로 요시다 다다토모 사민당 당수, 와타나베 기미요 다함께당 당수 등이 고이즈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그와 회동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고이즈미도 12일 기자회견에서 “총리가 결단하면 탈핵이 가능하다”며 어디까지나 자민당의 틀 내에서, 아베 총리에 의한 탈핵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도쿄신문>은 이와 관련해 “고이즈미 전 총리에게, 자신이 간사장과 관방장관 등으로 발탁한 아베 총리는 제자와 같은 사람”이라며 야권과 고이즈미 사이의 정치적 연대가 이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전망했다.

<아사히신문>은 14일치 사설에서 “(핵 발전소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거리나 인터넷 공간에서 의견을 쏟아냈지만 정치권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를 대변한 것이 고이즈미의 일련의 발언들”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일본 시민사회는 고이즈미가 대변한 진정한 민의를 어떻게 정치에 반영해야 하는가라는 ‘새롭고도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눌리지 않고,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고이즈미가 아닌 일본인들 자신이라는 진리를 최근의 고이즈미 현상은 새삼 일깨워준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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