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 ‘개헌’ 싸고 미묘한 긴장감
일왕, 팔순 생일날 ‘평화헌법’ 강조
“평화 지키려 지금 헌법 만들었다”
아베는 전날 “반드시 개헌할 것”
일왕, 팔순 생일날 ‘평화헌법’ 강조
“평화 지키려 지금 헌법 만들었다”
아베는 전날 “반드시 개헌할 것”
23일 80돌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 일왕이 지난 전쟁과 헌법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태도와 적잖은 불일치를 보였다.
일왕의 ‘정치적 이용’을 금지한 헌법 탓인지 일본 언론들은 일왕의 이번 발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진 않았지만 개헌 문제로 일본 사회 전체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아키히토 일왕은 23일 80살 생일을 맞아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지난 80년 동안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전쟁’으로 꼽으며 “앞날에 꿈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젊은 날에 목숨을 잃은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이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 일본국 헌법을 만들어 여러 개혁을 시행해 오늘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려고 여러 사람들이 쏟아부은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일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일본국 헌법에 담긴 평화와 민주주의 덕분이므로 이를 앞으로도 계승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발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에 견줘 아베 총리는 22일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 나와 “개헌은 내 평생의 과업(라이프 워크)이다. 무엇을 해서라도 이를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다음 중의원 선거까지 “3년의 임기가 남았다. 이 기간에 일본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차분히 정치가의 일을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밝혀온 개헌에 대한 욕망을 다시 한번 드러낸 셈이다.
현행 헌법에 대한 일왕과 아베 총리의 견해는 일본의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가장 민감한 정치적인 주제로 꼽힌다.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보수들은 현행 일본 헌법이 미 군정시기(1945~1952)에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 쉼없이 요구해 왔다. 실제로 자민당은 재집권 전인 지난해 4월 일왕을 국가원수로 명시하고, 군대의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를 대폭 손질하는 것을 뼈대로 한 헌법 개정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일왕은 지금까지 현행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일왕은 1989년 8월4일 즉위식 때 “헌법은 국가의 최고 법규이기 때문에 국민과 함께 법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전 다음해(1946년)에 학습원 초급과를 졸업한 나에게 헌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일본국 헌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4년 10월엔 아이들에게 국기와 국가를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역시 강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왕은 이번 기자회견에서도 “상징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일까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그 바람직한 모습을 찾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일본 헌법 1조에 담긴 일왕의 헌법상 지위인 “일본국의 상징으로 그 위치는 국민의 총의에 의해 정한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는 의미인 셈이다. 이 말엔 일본 군부가 천황의 군 통수권을 앞세워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전쟁의 길을 택한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일본 헌법 96조를 보면, 개헌을 하려면 중-참의원 모두에서 재적의원 3분의 2가 넘는 찬성이 필요하다. 자민당-공명당 연립정권은 중의원에선 3분의 2를 확보하고 있지만 참의원에선 의석이 모자라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