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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 강제징용 현장’서 한·중·일·대만 시민들 평화 길찾기

등록 2014-02-20 20:12수정 2014-02-20 22:12

15~17일 홋카이도 북서부 슈마리나이에 자리한 폐사찰 고켄사에서 한국, 일본, 재일 조선인, 대만, 중국, 아이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90여명이 참가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공동 워크숍’이 열렸다.
15~17일 홋카이도 북서부 슈마리나이에 자리한 폐사찰 고켄사에서 한국, 일본, 재일 조선인, 대만, 중국, 아이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90여명이 참가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공동 워크숍’이 열렸다.
[세계 쏙] 18회 맞은 ‘동아시아 평화 위한 공동워크숍’

“일단 아무런 설명 없이 영상을 볼까요?”

재일 조선인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인 코리아엔지오(NGO)센터의 김광민 사무국장이 본당 안의 불을 끄고 영상을 틀었다. 15일 밤 일본 홋카이도 북서부의 작은 마을 호로카나이초 슈마리나이지구에 자리한 폐사찰 고켄사에는 한국·일본·중국·대만의 시민들과 홋카이도 삿포로에 자리한 호쿠세이 고등학교,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2006년)의 무대가 됐던 홋카이도 조선학교의 학생들이 한가득 모여들었다. 전면에 설치된 화면에 2009년부터 최근까지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이하 재특회)이 벌여온 ‘혐한 시위’ 영상이 흐르자 장내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너도 조선인으로 프라이드를 갖고 있겠지. 빨리 나와서 죽임을 당해라.”(2011년 11월 도쿄 고다이라시 조선대학 앞) “여기서 난징 대학살과 같은 쓰루하시 대학살을 일으키자.”(2012년 오사카 쓰루하시) 영상이 종료되자 김 사무국장은 “여기 동아시아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애국심이 뭔지 함께 얘길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슈마리나이에선 1997년 이후 벌써 18년째 매년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모여 평화를 토론하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 워크숍’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왜 슈마리나이일까. 태평양전쟁이 진행되던 1930년대 말~19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이곳 슈마리나이에선 홋카이도의 산림 자원을 운송하기 위한 메이우선 철도와 그 주변을 흐르는 우류강에 댐을 만드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벌어졌다. 공사를 담당한 이들은 일본 각지와 조선·중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다코베야라고 불리는 감금시설에 갇혀 영양 부족과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숨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고켄사는 주변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이 숨지면 장례를 치르기 전에 주검이 하룻밤을 보내던 절이었던 것이다.

일 홋카이도 오지 슈마리나이
태평양전쟁때 철도·댐 건설현장
한·중·일 노동자들 유골 곳곳에
1976년 유해 반환 운동 시작

1997년부터는 워크숍 의기투합
매년 동아시아 젊은이들 평화 토론
올해도 ‘혐한시위’ 등 진지한 논의
“말 안통해도 설득 포기 말아야”b>

이곳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역사를 다시 전면에 들춰낸 것은 지역의 시민들이었다. 중심 인물은 주변 다도시에 자리한 이치조사의 주지인 도노히라 요시히코(68)였다. 이들은 1976년 ‘소라치(홋카이도 북서부 내륙 지역의 지명) 민중강좌’를 만들어 지난 시기 벌어진 강제노동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재일 조선인을 찾아내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함부로 매장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골을 발굴해 유족들에게 반환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재일 조선인 채만진(작고)의 아들 채홍철(60)씨는 “고등학교 때 지자체가 보관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매화장인허증(주검을 매장 또는 화장할 때 지자체가 내주는 허가증)을 확인해 한국의 주소지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한국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여기에 1989년 이치조사에서 운영중인 공동육아 형식의 보육원을 연구하기 위해 도노히라를 방문했던 정병호 한양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의기투합을 한 것을 계기로 1997년 동아시아 젊은이들이 한데 모이는 워크숍이 시작됐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상징하듯 절의 본당 안에는 일본인·조선인 노동자들의 위패, 강제노동이 진행되던 시기의 참상을 보여주는 물품과 흑백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또 절의 본당은 1995년부터 ‘조릿대의 모표전시관’(홋카이도에서 많이 자라는 조릿대 밑에 조선인들 유골이 묻혀 있다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은 전시관으로 운영중이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일본 고등학생들이 준비해 온 주제에 대해 발표를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그냥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저는 차별이 싫습니다.”(17·사토 류노스케) “정말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더 알려져야 합니다.”(17·이시즈카 다이치) 그러나 본당엔 조금씩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재특회의 말이 틀리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표현 방식이) 일본인으로서 비참하게 느껴졌다”거나, “재일 조선인들이 본명을 두고 통명(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게 특권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기 때문이다.

고켄사에는 이 주변에서 벌어진 댐과 철도 공사 과정에서 숨진 일본인·조선인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숨진 이들은 일본인 168명, 조선인 45명으로 추정된다.
고켄사에는 이 주변에서 벌어진 댐과 철도 공사 과정에서 숨진 일본인·조선인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숨진 이들은 일본인 168명, 조선인 45명으로 추정된다.

반론이 쏟아졌다.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 도쿠야마 리나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이 이름이 강제로 붙여진 것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왜 그때 좀더 자신감 있게 살지 못했나 생각을 합니다.”(홍리나·재일 조선인) “야마노테선(도쿄의 전철 노선)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던 재일 조선인 여학생이 가위에 찔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재일 조선인들은 늘 그런 위험에 놓여 있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통명을 쓴다는 측면도 있습니다.”(일본인 고등학교 교사) “일본의 초등학교에 한국인 활동가가 방문해 강연을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름이 뭐지요’ 하니까 아이들이 스즈키, 야마모토, 나카야마 등 일본 이름을 댔습니다. 그러자 활동가는 내일부터 ‘너는 마이클, 너는 스티븐, 너는 존이라고 부르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일제히 ‘이야다’(싫다)라고 외치더군요. 재일 조선인들에게 통명이란 선택된 게 아니라 강요된 것입니다.”(채홍철)

토론은 점점 뜨거워지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땐 설득해야 하는지로 확대돼 갔다. 아사히카와 교육대학에서 온 한 학생은 “아무리 진심을 전하려 해도 사람들은 (일본의 전후책임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며 흐느껴 울었다.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다양한 고백 속에서 고바야시 지요미 전 중의원(민주당)이 활기차게 일어나 말을 받았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요. 저도 전에 국회에서 그랬습니다. 매우 힘이 들고 풀이 죽는 일이지만,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친구들을 늘려가야 합니다.”

토론을 마친 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아침이슬’, ‘임진강’(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그린 노래.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 <박치기>(2004)에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후루사토’(고향이란 뜻의 대중적인 일본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위로했다. 18년 동안 이어져온 동아시아인들의 작은 만남은 지금까지 그랬듯 내년 겨울에도 이곳 고켄사에서 계속될 거다.

슈마리나이(홋카이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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