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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본 ‘맛의 달인’ 후폭풍…피폭과 코피 사이, 진실을 유보하노라

등록 2014-05-30 19:13수정 2014-05-31 15:53

<맛의 달인: 후쿠시마의 진실> 편에서 후쿠시마에 갔다 온 주인공 야마오카 시로(한국 번역명 지로)가 코피를 흘리는 장면. 그 왼편에 이도가와 가쓰타카 전 후타바마치 정장의 그림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맛의 달인: 후쿠시마의 진실> 편에서 후쿠시마에 갔다 온 주인공 야마오카 시로(한국 번역명 지로)가 코피를 흘리는 장면. 그 왼편에 이도가와 가쓰타카 전 후타바마치 정장의 그림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 한편의 만화가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맛의 달인>이 주인공입니다. 작가 가리야 데쓰는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던 후쿠시마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논란은 일본 환경상과 관방장관 등 정부 요인들뿐 아니라 후쿠시마 주민, 의료진, 넷 우익까지 동참하는 거대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후쿠시마에서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느냐가 그 주제입니다.

‘어라, 이건 뭐지!’

지난 4월29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을 읽다가 사회면(26면) 한구석에 등장한 만화 한 컷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놀란 눈으로 코피를 흘리고 있는 주인공은 일본의 유명 만화가 가리야 데쓰(72)의 대표작 <맛의 달인>(일본 이름 오이신보·美味しんぼ)의 주인공 야마오카 시로였다. 만화는 야마오카가 2011년 3월 원전 사고가 발생했던 후쿠시마현을 취재하고 돌아온 뒤 갑자기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코피를 흘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4월 말부터 5월 한달 내내 일본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른바 ‘맛의 달인 사태’의 시작이었다.

<맛의 달인>은 일본의 만화 전문 출판사 쇼가쿠칸(소학관)의 인기 만화잡지 <빅 코믹 스피리츠>를 통해 무려 32년간 장기 연재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인기 만화다. 만화는 일본 <도자이(동서)신문>의 문화부 기자인 야마오카와 여기자 구리타 유코가 신문 창간 100돌을 맞아 독자들에게 최고의 음식을 뜻하는 ‘궁극의 메뉴’(한국판 번역은 ‘완벽한 메뉴’)를 취재하면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이 만화는 다른 요리만화와 달리 식품안전이나 이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다양한 고민을 치밀한 사전 취재를 통해 전달해 인기는 물론 무시하지 못할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해왔다. 그 덕에 만화는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1998~1992년)은 물론 드라마로도 두 차례(1994~1999년, 2007~2009년)나 제작됐고, 현재 110권까지 나온 단행본의 판매량은 무려 1억2000만부에 이른다. 한국에선 적당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지만, 허영만 화백의 <식객>과 이원복 화백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합친 만화가, 모두 알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정면으로 말을 건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이 갑자기 코피 흘리자
정장도 코피가 난다고 말한다
교수는 “후쿠시마에선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작가는 불편한 진실에 도전했다 

갑상샘암 발병 추이 추적조사
아직 타 지역과 큰 차이 없어
체르노빌 땐 5년 뒤에야 인정
암 등과의 인과관계 입증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극적 관심 뒤 무차별 공격 받는 가리야 작가

그렇지만 무엇보다 만화가 일본인들의 관심을 극적으로 불러모은 것은 만화에 등장하는 묘사가 말 그대로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2012년 이후 만화가 집중하고 있던 주제는 지난 원전 사고가 후쿠시마에 끼친 영향을 다룬 ‘후쿠시마의 진실’이었다. 4월28일 공개된 이 에피소드 22편에선 주인공이 갑자기 코피를 흘리자,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입지해 있는 후타바마치의 이도가와 가쓰타카 전 정장이 “나도 (코피가) 난다. 후쿠시마에선 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 5월12일 발행된 23편에선 이도가와 전 정장이 다시 등장해 “(후쿠시마에) 코피와 피로감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 것은 피폭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에 더해 아라키다 다케루 후쿠시마대 준교수도 실명으로 등장해 “후쿠시마에선 더 이상 살 수 없다. 후쿠시마의 광범위한 지역을 제염(방사능이 떨어진 지역의 표토를 걷어내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작업)해 사람이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받았을 충격과 놀라움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후 작가 가리야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이시하라 노부테루 환경상은 5월9일 기자회견에서 “전문가들은 원전 사고와 코피 사이엔 인과관계가 없다고 평가한다. 묘사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고, 이어 12일 후쿠시마현과 후타바마치가 출판사인 쇼가쿠칸에 “현의 품평에 피해를 입혔다. 매우 유감이다”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전달했다. 같은 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나서 ‘피폭과 코피’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시 한번 부인했다. 그러자 만화에 등장하는 이도가와 전 정장이 페이스북에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게재한 데 이어, 23일엔 니시오 마사미치 홋카이도 암센터 명예원장 등이 일본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방사성물질이 부착된 미립자가 비강(콧구멍)에 들어간다면 저선량(의 피폭)으로도 코피가 터질 수 있다.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 얘기”라고 반박했다. 인터넷 공간에선 일본 우익들이 가리야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나는 기미가요(일본 국가)와 히노마루(일본 국기)가 정말 싫다”는 글을 인용하며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번 사태가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될까. 불행히도 당분간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대립’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전 사고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건강에 심각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우려가 크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사실이 입증된 다음엔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일본에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뒤 후쿠시마현내 어린이 28만7000명을 상대로 갑상샘(갑상선)암 발병 추이에 대한 추적조사를 벌이고 있다. 만화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19일 현은 이에 대한 2013년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 내용을 짧게 줄이면 지난 3년 동안 현에서 갑상샘암이 발병했거나 그런 우려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아이들이 90여명에 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현은 “현시점에서 이것이 피폭의 영향인지 확언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믿기 힘든 무책임한 반응으로 보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체 조사 대상 가운데 발병한 아이들의 비율이 다른 지역과 견줘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주민들은 ‘국가 조사’를 믿을 수 없다며 별도의 추적조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이도가와 전 정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코피 흘리는 모습이다.  이도가와 가쓰타카 페이스북
이도가와 전 정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코피 흘리는 모습이다. 이도가와 가쓰타카 페이스북
“아이들, 암 발병 위험 증가 가능성 있다”

왜 그런 결론이 나왔을까. 우리 몸은 방사선에 노출되면 크든 작든 피해를 입는다. 인간의 신체는 세포들의 약한 전기자극에 의해 연결돼 있는데, 그보다 무려 10만~100만배나 강한 에너지를 가진 방사선이 신체를 통과하면서 이 전기자극을 뿔뿔이 끊어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사능 피폭의 무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는 1999년 9월30일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핵연료가공공장(JCO)에서 발생한 ‘임계 사고’(우라늄 등 핵분열 물질이 일정 조건을 충족해 실제로 핵분열을 일으킨 사고)가 있다. 이 사고로 치사량의 중성자 피폭을 당한 작업원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는 일본 최고 의료진의 집중치료에도 불구하고 각각 83일과 240여일 만에 허무하게 숨지게 된다. 방사선이 우리 몸의 디엔에이(DNA)에 담긴 유전정보를 모두 파괴해 인간이 삶을 이어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세포 재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고선량의 방사선에 노출될 경우엔 곧바로 화상, 구토, 탈모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를 고선량 방사선에 의한 급성장애라 한다.

고선량의 방사선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 이들은 원전 주변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다. 원전 주변 주민들은 이보다 한참 강도가 낮은 저선량의 방사능에 노출된다. 저선량 방사선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선 과학적 입증이 쉽지 않아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인류사 최악의 원전 사고였다고 평가되는 체르노빌 사고의 사례를 보자. 사고가 발생한 뒤 수습에 투입됐던 원전 노동자와 소방사 등 237명은 급성 방사능 장애를 일으켜 3개월 만에 28명이 숨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다음 문제는 원전 사고가 주변 지역민들에게 가져다줄 장기적인 영향이었다. 이를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사고가 벌어진 지 3년이 지난 1989년부터 국제자문위원회를 설치해 지역 주민들에 대한 관찰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방사능에 민감한 아이들을 위해 1990년엔 5~10살 어린이를 대상으로 오염지역에서 325명, 대조지역에서 255명을 뽑아 대규모 조사를 벌인다. 그 결과 오염지역에선 5.5%, 대조지역에선 7.5%의 어린이들에게서 ‘갑상샘 비대증’이 확인됐다. 대조지역 아이들에게서 더 많은 이상이 나타났으니 원전 사고의 영향이 부정된 셈이다.

그 이듬해인 1991년부터 아이들에게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매우 희귀한 갑상샘암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그런데도 러시아와 미국 쪽 위원들은 유의미한 통계적 차이가 관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과 원전 사이의 인과관계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다마 다쓰히코 도쿄대학 선단과학기술연구센터 교수의 2009년 논문 <체르노빌 원전사고로부터 갑상샘암의 발병을 배운다>를 보면, 오랜 시간에 걸친 광범위한 표본조사 끝에 세계 의학계는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 가까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원전 사고와 갑상샘암 증가 사이의 원인을 인정하게 된다. 논문이 인용하는 벨라루스 학자의 연구를 보면, 1989년까지는 체르노빌과 가까운 벨라루스 지역 어린이들의 10만명당 갑상샘암 환자 수가 0.2명에 불과해 사고 전과 큰 차이가 없다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해 1995년엔 예전보다 20배 높은 4명으로 최고점을 찍는다. 이런 연구 성과에 기반해 세계 의학계는 체르노빌 사고로 최소 4000여명의 소아 갑상샘암 환자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학계는 갑상샘암 외의 다른 질병과 원전 사고의 인과관계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엔 과학위원회(UNSCEAR)는 지난달 내놓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보고서에서 “피폭에 의해 이후 암 발생이 증가하는 것을 예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해선 ‘암 발병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데 머물고 있다.

개운치 않은 논쟁 마감, 비판하기도 애매한…

<맛의 달인>을 게재하는 출판사 쇼가쿠칸은 22일 발행된 <맛의 달인> ‘후쿠시마의 진실’ 마지막 편에 붙은 편집자의 견해에서 “건강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기분 탓’이라고 정리돼 자신의 증상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분들의 의견도 있다. ‘소수의 목소리다’ ‘인과관계가 없다’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등의 이유로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다루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고 만화 게재 이유를 설명했다. 가리야도 2012년 9월 후쿠시마의 진실 편을 연재하겠다는 사실을 알리며 개인 블로그에 “나는 후쿠시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후쿠시마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고, 전하고 싶은 것도 진실”이라고 각오를 다진 바 있다. 그러나 사고가 터진 뒤 쇼가쿠칸은 당분간 만화 게재를 중단하기로 했고, 가리야는 22일 블로그를 통해 “예전부터 정해졌던 일”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맛의 달인>을 둘러싼 논란은 30일 현재 대부분 사그라진 상태다. 이는 불편한 사실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고 감추는 일본 사회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방사능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논의를 진행할 시점이 안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체르노빌의 사례를 본다면, 의학계에서 인정할 만한 갑상샘암 발병에 대한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원전 사고가 터진 지 5년이 지난 2016년께부터 관찰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로 인해 일본 사회는 뭔가 불안하긴 해도, 그 불안한 내용이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평소의 모습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모두가 많은 의견을 쏟아냈지만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채로 매우 중요한 사회적 논쟁이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다. 너무나 아쉽긴 하지만 뭐라 비판하기도 힘든 참으로 애매하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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