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대북제재 해제]
60여년 ‘불신의 벽’ 넘었지만
북핵 해결없인 관계개선 한계
국교 정상화까진 험난
60여년 ‘불신의 벽’ 넘었지만
북핵 해결없인 관계개선 한계
국교 정상화까진 험난
3일 일본 정부가 독자적으로 북한에 가해온 경제제재를 일부 해제하기로 한 조처는 소용돌이 속의 동북아시아 정세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양국이 지난 60여년간의 불신의 벽을 뛰어넘어 2002년 9월 평양선언 이후 처음으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기반한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 아래 이번 협상에 나섰다. 아베 정권은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은 물론 한국과도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납치 문제를 해결해 북-일 관계를 개선하면 집단적 자위권 문제로 떨어진 지지율을 만회하는 것은 물론 장기 집권도 가능해진다. 북한도 핵개발과 장성택 숙청 등으로 관계가 틀어진 중국, 관계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국을 뛰어넘어 일본을 통한 경제 재건의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양국의 전략적 선택이 맞아떨어진 결과가 ‘북한이 납치자 문제를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가동하는 시점에 일본이 독자적인 제재 조처를 해제한다’는 지난 5월29일 ‘스톡홀름 합의’였다.
이 합의를 반드시 살리겠다는 신호는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지난달 19일 총련의 도쿄 본부 건물의 매각 절차를 일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건물 경매는 법원의 업무로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론적 견해를 밝혀왔다. 그러나 북한의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 담당대사가 스톡홀름 협의 이후 귀국길에서 총련 건물 문제 해결을 되풀이해 강조하자, 일본 정부는 지난 한달 동안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법원과 치열한 물밑작업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북-일 관계는 단기적으로는 4일 출범하는 위원회가 내놓는 조사 결과에 따라 판가름이 날 전망이다. 일단 북한이 권력 중추기관인 국방위원회와 국가안전보위부의 간부를 위원회에 배치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결과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1차 조사 결과를 올 늦여름이나 초가을께 제시하고, 1년 안에 최종 결과를 내놓겠다는 일정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의 자세를 보며 위원회 조사 결과를 조정할 가능성도 있다. 박정진 쓰다주쿠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위원회의 성과는 만경봉92호 문제와 총련 건물의 처리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일 간 인적·물적 교류의 주요 통로인 만경봉호와 일본 내 북한의 외교공관 구실을 해온 총련 본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북한이 아베 총리한테 ‘납치 문제 해결’이라는 선물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북한이 납치 피해자 문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할 땐 잔류 일본인 등 다른 분야의 성과를 내세워 일본에 타협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일 “납치 피해자 조사는 단순한 실무 합의가 아니다. 최고 영도자(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정한 목표는 1990년대 이래 미완의 과제로 남은 냉전구조의 청산(북-일 국교 정상화)”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톡홀름 합의가 가능했던 3대 요인으로 △중국의 부상 △미국의 쇠퇴 △공화국(북한)의 핵보유를 꼽았다. ‘핵을 보유했기 때문에’ 북-일 합의가 가능했다는 북한의 인식은 “북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이 없는 국교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일본과는 접점을 찾기 힘든 견해 차이다.
결국 북한은 이번 합의를 징검다리 삼아 평양선언 이후 12년 동안 표류해온 북-일 국교 정상화 회담으로 나아가려 하겠지만, 일본은 납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할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일본이 북핵 문제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는 순간 2002년처럼 미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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