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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한국 절도범이 불상 훔쳐간 지 2년, 쓰시마 사람들은…

등록 2014-08-22 19:51수정 2014-08-23 11:17

자비로운 얼굴을 한 통일신라시대 동조여래입상(왼쪽)과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좌상이 가뜩이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한-일 관계를 뒤흔드는 외교문제로 비화된 지 만 2년이 되어간다. 서일본문화협회가 1978년 펴낸 <쓰시마의 미술>은 이 불상들에 대해 각각 “8세기 제작된 신라불로 일본의 나라시대 금동불에 영향을 줬다” “제작 과정이 알려진 고려불로 매우 귀중한 존재”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오랜 시간 일본에 보관돼 있다가 느닷없는 절도 사건으로 고국에 돌아온 이 불상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불상의 미소 속에 담긴 참된 평화와 우호의 정신을 현재에 되살릴 묘안은 과연 없는 것일까. 글 쓰시마/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자비로운 얼굴을 한 통일신라시대 동조여래입상(왼쪽)과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좌상이 가뜩이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한-일 관계를 뒤흔드는 외교문제로 비화된 지 만 2년이 되어간다. 서일본문화협회가 1978년 펴낸 <쓰시마의 미술>은 이 불상들에 대해 각각 “8세기 제작된 신라불로 일본의 나라시대 금동불에 영향을 줬다” “제작 과정이 알려진 고려불로 매우 귀중한 존재”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오랜 시간 일본에 보관돼 있다가 느닷없는 절도 사건으로 고국에 돌아온 이 불상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불상의 미소 속에 담긴 참된 평화와 우호의 정신을 현재에 되살릴 묘안은 과연 없는 것일까. 글 쓰시마/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한국 절도범이 불상 훔쳐온 지 2년
해신신사와 관음사 현장의 목소리
불상 도난당한 쓰시마의 시각
▶ 한반도 도래 불상은 쓰시마의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쓰시마에서 확인 가능한 한반도 도래 불상은 130여개. 13일 만난 서산사(세이잔지)의 전 주지 다나카 셋코에게 그 이유를 묻자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해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도래한 것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쓰시마 불상을 ‘왜구 약탈’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한국인과 달리, 쓰시마인들은 한-일 간의 오랜 문화교류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었다. 쓰시마의 시각을 통해 2012년 10월 발생한 불상 도난 사건을 재구성했다.

“관음사(간논지)가 어디죠?”

지난 14일 오전, 일본 쓰시마의 중심 이즈하라항을 출발한 차량은 섬을 종단하는 국도 382호를 타고 북진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2년 전 한국인 절도범들이 불상을 훔친 쓰시마의 해신(가이진)신사와 관음사. 정확한 지번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신사는 내비게이션을 통해 쉽게 위치를 찾아냈지만, 관음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대략의 주소지인 중부 도요타마까지 이동해 지역민들에게 절의 위치를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관음사라는 그럴듯한 사찰명에 속아 귀중한 고려시대 불상을 소장할 만한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초조해지는 마음과 달리 왕복 1차로인 쓰시마의 좁다란 해안 절벽길이 굽이칠 때마다 수려한 바다 전경이 눈앞에 안겼다 사라졌다. 한 시간여를 헤맨 끝에 섬의 중부 서쪽 해안에 자리한 고즈나 마을의 우체국 직원을 통해 절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 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가면 있습니다만, 역시 불상 때문인가 보군요.”

끔찍한 그날, 2012년 10월8일

허름한 시골 골목을 200m쯤 거슬러 오르자 성냥갑만한 목조건물 현관에 ‘임제종 서정산 관음사’(臨濟宗 瑞正山 觀音寺)라고 쓰인 현판이 나왔다. 평소 스님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 사찰이었다. 왜 이런 시골구석에 고려시대의 품격 있는 불상이 보관돼 있던 걸까.

2012년 10월6일 한국인 절도범 일당이 쓰시마 해신신사의 동조여래입상(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3259호)과 관음사에 보관돼 있던 관세음보살좌상(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 8호) 등 불상 2점 등을 훔쳐낸 지 만 2년이 되어간다. 꼭 불상 때문은 아니지만, 한-일 관계는 그동안 가파르게 악화돼 왔다. 일본 언론은 ‘훔쳐간 불상’을 돌려주지 않는 한국의 모습을 상식과 법치가 통하지 않는 전형적 사례로 선전해 왔다.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의 다른 현안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도 예전보다 차갑게 식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오랜 시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이끌어온 혜문 스님이 지난 1월 문화재청을 상대로 불상 2개 가운데 원소재지를 알 수 없는 해신신사의 동조여래입상을 즉각 일본에 반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행정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5월 “(제3자인) 혜문은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반환 청구를 ‘각하’했다. 한국이 훔쳐온 불상을 일본에 돌려주지 않는 게 맞느냐는 소송의 진짜 취지에는 답하지 않은 전형적 ‘도망가기’ 판결이었다. 난마처럼 꼬인 쓰시마 불상 문제의 해결책은 뭘까. 지난 13~14일 쓰시마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려 섬을 찾아가 봤다.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좌상을 도둑맞은 관음사의 본사인 서산사엔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참여했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절의 전 주지인 다나카 셋코 스님이 비를 보며 한-일 교류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성일은 귀국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가 왜란이 벌어진 직후 파면되는 아픔을 겪었다.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좌상을 도둑맞은 관음사의 본사인 서산사엔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참여했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절의 전 주지인 다나카 셋코 스님이 비를 보며 한-일 교류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성일은 귀국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가 왜란이 벌어진 직후 파면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본인들 동의 없는 한 그 불상은 장물일 뿐”

쓰시마시 미네초 기사카 마을에 사는 시마이 도시카즈(67)는 2012년 10월8일을 ‘끔찍한 날’로 기억한다. 그는 마을 한켠에 자리한 해신신사의 운영·관리를 담당하는 임원회의 부총무로 신사가 소장하는 문화재를 관람객들에게 공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신사가 소장한 문화재 130여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동조여래입상이다. 그는 10월6일 오전 문화재가 보관돼 있는 보물관으로 한차례 관람객을 안내했고, 이틀 뒤인 8일 오전 또다른 손님을 데리고 보물관의 자물쇠를 풀려던 참이었다. 그는 “철문에 설치돼 있던 자물쇠가 두 개 다 망가져 있었다. 놀란 마음에 문을 열어 보니, 불상이 보관돼 있던 방범 진열 케이스가 앞으로 넘어져 있고, 부처님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고 말했다. 1000년 가까이 신사가 소중히 보관해온 불상이었다. 혼비백산한 시마이는 곧바로 경찰에 도난 사실을 알렸다.

 그 무렵 범인 김아무개(71)씨 일당은 이미 후쿠오카현의 하카타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페리에 몸을 싣고 있었다. 두 달 전인 2012년 8월 김씨는 동생(67) 등 일당에게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를 일본이 약탈해 간 것이 많은데 우리가 그것을 훔쳐와 팔아먹자”고 제의한 적이 있다. 이들은 8월 초부터 10월까지 세 차례나 쓰시마 현장을 답사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한 끝에 10월6일 밤 범행에 나섰다. <조선일보>의 지난해 4월 보도를 보면, ‘자칭 애국자’라고 주장한 이들 4명의 전과를 합치면 56범으로, 한때 “억울함을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고 한다. 이들은 쓰시마에서 출국자용 엑스선 검색대가 없는 하카타로 이동한 뒤 8일 통관을 도와줄 골동품상 손아무개(61)씨와 만나 불상을 들고 부산항 입국 검색대를 태연하게 통과했다.

관세음보살좌상 있던 관음사는
내비게이션에도 찍히지 않았다
지역민들도 위치를 잘 몰랐다
큰 절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평소 스님 없는 무인사찰이었다

이번 논란 핵심은 약탈 문화재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가
그동안은 1905~1945년에 한정
이번 절도 사건 통해 그 범위가
14세기 말까지로 확장된 셈

 

그 불상들이 한국의 지하창고로 오기까지 

쓰시마 서산사(세이잔지)의 전 주지 다나카 셋코가 불상 도난 사실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해신신사의 사고를 접수한 경찰이 주변 사찰의 불상이 잘 있는지 일제점검에 나섰기 때문이다. 서산사는 쓰시마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불교 종파인 임제종의 본사, 불상이 있던 관음사는 그 밑의 말사였다. 다나카 전 주지는 “도난 소식을 듣고 이건 분명 한국인의 소행일 것이라 직감했다”고 말했다. 사라진 불상 2점은 모두 일본의 지정문화재로 일본 국내에선 유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니까 한국에선 이를 구입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김씨 일당은 업계의 ‘선수’가 아니었다. 중요문화재를 훔쳤을 땐 사태가 가라앉기까지 당분간 잠수를 타야 하지만, 이들은 범행 직후인 10월 하순부터 “20억원” “15억원” 따위의 값을 불러대며 유통을 시도했다. 결국 일당은 2012년 12월22일 경찰에 체포됐고, 불상은 한달 뒤인 2013년 1월23일 정부의 관리 아래 들어가게 된다. 시마이 부총무는 “불상을 찾았단 보도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법치국가니까 불상이 곧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그때까진 “훔친 문화재는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론을 언급하고 있었다.

품격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인 동조여래입상이 보관돼 있던 해신신사 보물관. 불상은 1995년에도 도난됐다가 가마쿠라에서 발견돼 다시 신사로 돌아온 적이 있다.
품격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인 동조여래입상이 보관돼 있던 해신신사 보물관. 불상은 1995년에도 도난됐다가 가마쿠라에서 발견돼 다시 신사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가 등장했다. 문제는 관음사에 보관돼 있던 관세음보살좌상이었다. 이 불상은 1951년 “1330년(고려 충선왕 원년) 영원토록 (서산) 부석사에 봉양, 공양하고자 서원한다”는 내용의 ‘복장 조성문’(불상을 만든 유래를 적어 불상 안에 보관한 문서)이 발견된 고려 불상 가운데서도 제조 장소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우 희귀한 문화재였다. 수백년 만에 돌아온 보살님 소식을 접한 부석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부석사의 말을 들어보면, 절이 이 불상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30여년 전인 1980년대로, 1996년엔 당시 주지이던 도광 스님이 일본 관음사를 방문해 반환을 요청한 일도 있다고 한다. 부석사는 2013년 1월31일 대전지방법원에 “불상을 일본에 반환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가처분 소송을 냈고, 법원은 2월26일 이를 받아들였다. 이 불상의 존재를 국내 학계에 처음 알린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도 비슷한 시기 <서산문화춘추>를 통해 “이 보살상은 불상을 만든 이들이 부석사에 영원히 봉양하기를 서원했던 것이다. 이후 1370년 전후 서산을 다섯 차례 이상 침탈했던 왜구들에게 약탈당해 관음사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론은 단숨에 ‘반환 불가론’으로 전환됐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일본에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약탈 문화재’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해야 할지에 모아진다. 그동안의 반환 운동은 1905년 러일전쟁 무렵부터 1945년 8월 해방이라는 시간적 범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약탈 문화재의 범위가 14세기 말 ‘왜구의 약탈로 추정되는 사건’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 사이엔 왜구의 약탈을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로 인식하는 일본과 꼭 그게 쉽지만은 않은 한국 사이의 역사인식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반환 요구는 사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쓰시마의 향토사 연구 일인자인 나가도메 히사에(94)는 “한국인들이 불상을 둘러싼 한국과 쓰시마 사이의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 불상을 둘러싼 한국과 쓰시마 사이의 관계사를 설명하기 위해 <도난당한 불상>이라는 작은 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쓰시마에서 한반도 도래 불상은 사실 매우 일상적인 풍경이다. 쓰시마시 교육위원회가 2010년 펴낸 <쓰시마시의 문화재>라는 소책자를 보면, 이번에 도난당한 해신신사의 불상이 첫 표지에 등장한다. 섬의 중심인 이즈하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쓰시마역사민족자료관에는 한반도 출신 소형 불상 2점이 태연하게 전시돼 있고, 한국어로 번역된 ‘쓰시마의 모든 것’이라는 관광 안내 지도에는 9세기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동조여래좌상이 소개돼 있다. 1976년 규슈대학 미학미술사연구실이 문부과학성의 지원을 받아 섬에 산재한 문화재를 일제조사한 뒤 펴낸 <쓰시마의 미술>(1978)을 보면, 쓰시마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 신라, 고려 등에서 유래한 불상 87점을 소개하고 있다. 나가도메는 “현재까지 확인되는 한반도 도래 불상은 130여점으로, 신앙의 대상인 불상을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실제 수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쓰시마를 포함한 일본 전역엔 오래전부터 일본 고유의 자연 신앙인 신도와 불교가 합쳐진 신불습합(神佛習合) 전통이 유행했다. 불상을 신사의 신앙의 대상인 ‘신체’(神體)로 모셨던 것이다. 특히 쓰시마는 1274년, 1281년 고려-몽고 연합군의 잇따른 침공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로 인해 한반도를 마주한 쓰시마의 서쪽 해안에 고대 삼한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전설 속의 인물인 신공왕후를 모시는 하치만(八幡) 계열의 신사들이 산재해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은 만들 수 없는 신라의 격조 높은 불상의 힘을 빌려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동조여래입상을 도둑맞은 해신신사 임원회 전 부총무 시마이 도시카즈(67)가 신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신사에서 소중히 보관해온 불상을 꼭 돌려달라”고 말했다. 사고 뒤 신사는 보물관에 보관돼 있던 문화재 130여점(사진에 보이는 도자기 등 포함)의 보관과 관리를 시에 위탁해야 했다.
동조여래입상을 도둑맞은 해신신사 임원회 전 부총무 시마이 도시카즈(67)가 신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신사에서 소중히 보관해온 불상을 꼭 돌려달라”고 말했다. 사고 뒤 신사는 보물관에 보관돼 있던 문화재 130여점(사진에 보이는 도자기 등 포함)의 보관과 관리를 시에 위탁해야 했다.
쓰시마엔 왜 한반도 불상이 산재해 있나 

쓰시마 불상 관련 일지
쓰시마 불상 관련 일지
나가도메는 “쓰시마에 한반도 출신 불상이 많은 것은 한반도와 쓰시마 사이의 오랜 교류의 결과로, 단순히 이를 왜구에 의한 약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즉 쓰시마의 불상들은 한반도와 쓰시마의 오랜 교류의 역사 속에서 구입해 오거나, 기증받거나, 버려진 것을 주워 오거나, 약탈해 모아온 모든 역사의 총체라는 것이다. 그는 “불상이 쓰시마에 건너온 지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고, 불법 약탈인지를 명확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약탈했다는 가설로 불상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게 합리적인 처사냐”고 물었다. 일본에선 쓰시마 등에 한반도 도래 불상이 산재하는 이유가 ‘왜구의 약탈’보다는 조선시대 진행된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이라는 데 무게를 싣고 있다. 조선 초기 억불정책에 의해 망가지고 상한 불상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물론 부석사 불상이 어떤 경위로 일본으로 옮겨갔는지를 명명백백히 입증해줄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혜문은 “꼬이고 꼬인 불상 문제를 풀려면 해신신사의 불상은 즉각 원 소유지로 반환하고, 부석사의 불상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대로 불상이 관음사에 모셔지게 된 경위를 더 파악한 뒤에 처리 방식을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몰수를 집행한 뒤 3개월 내엔 몰수물을 돌려줘야 한다”는 한국 형사소송법의 조항(484조)과 도난 문화재의 반환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협약을 꼽고 있다.

혜문이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불상을 반환하는 게 정치적으로 온당할 뿐 아니라, 실리적으로도 이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불상을 지금처럼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현재 2개의 불상은 부석사의 가처분 소송이 받아들여져 문화재연구소 지하창고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부석사 불상의 소유권을 확정하기 위한 본안 소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본안 소송을 내려면 부석사가 이 불상이 자신의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왜구의 약탈’을 입증해야 하고, 약탈을 입증한다 해도 500~60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을 현재의 사법절차를 통해 원상회복하는 게 가능한지 만만찮은 법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 반대로 일본의 다나카 전 주지도 “수백년 동안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불상을 훔쳐간 뒤 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도난품을 돌려받기 위해 왜 소송을 내야 하냐”고 말했다. 결국 불상은 한-일 양국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을 때까지 어두운 지하창고를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다.

이에 견줘 혜문은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에 있는 이천 오층석탑의 환수를 진행하는 ‘이천오층석탑환수위’에 참여하고 있고, 조만간 도쿄국립박물관을 상대로 ‘오구라 컬렉션’(일제강점기 때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1922년에서 1952년까지 한반도에서 수집해간 유물 1100여점) 가운데 도난품이 분명한 조선대원수 투구 등 13점의 유물의 반환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쓰시마 불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과 문화재 반환 교섭을 하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다.

“불상 건너온 지 수백년 흘렀고
불법 약탈인지를 명확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약탈했다는 가설로
못 돌려준다는 게 합리적이냐”

부석사가 관세음보살좌상의
소유권 확정 위한 소송 내려면
뚫어야 할 사법절차 머나먼 길
일본 다나카 전 주지도 도난품의
반환소송 내야 할 이유 못 느껴

 

“불상 반환 늦어져도 교류는 계속한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후 일본을 상대로 한 문화재 환수 작업은 지난한 고통 끝에 이뤄져 왔다. 일본 정부가 한국의 문화재 반환 요청에 대해 기본적으로 “한일협정을 통해 모두 끝난 문제”라는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일협정 당시 △국유문화재는 기부(반환이 아님)한다 △사유문화재는 돌려줄 수 없다 △문화재 인도는 정치·문화적 고려에 의한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등의 3가지 입장을 밝힌 뒤 지금껏 이를 관철하고 있다. 그래서 2006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도쿄대에서 서울대로 이전할 때 ‘반환’이 아닌 ‘기증’의 형식을 따랐고, 2011년 일본 궁내청의 <조선왕조의궤>를 받아올 때도 “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서적”에 한정됐다. 일본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 가운데 한명인 아라이 신이치 한국·조선 문화재 반환문제 연락회의 대표(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는 지난해 4월 불상 사태가 벌어진 뒤 성명을 내어 “문화재 반환 문제는 상호 이해와 문화교류에 의해서 해결해야 하며 일방적인 해석이나 욕심으로 추진하면 도리어 사태가 악화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해신신사의 보물관 정문. 불상을 훔친 일당은 이 문에 설치된 자물쇠 두 개를 부수고 안으로 침입했다.
해신신사의 보물관 정문. 불상을 훔친 일당은 이 문에 설치된 자물쇠 두 개를 부수고 안으로 침입했다.
지난 13일 굽이굽이 차를 몰아 찾아간 섬의 남부 구와 마을에서 만난 호리에 마사타케(70) 쓰시마시의회 의장은 “불상 반환이 늦어져 한국에 대한 감정이 나빠진 사람도 있을 거라고 보지만 다수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쓰시마시의회는 지난해 3월8일 “범죄에 의해 빼앗긴 문화재들을 조속히 반환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지역 시민단체는 시민 1만7000여명이 참여한 서명 용지를 일본 정부에 제출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속한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쓰시마인들이 결국 택한 것은 교류였다. 호리에 의장은 “불상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교류를 안 해도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역시 우호관계는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건넨 명함을 보니 앞면엔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뒤에는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들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일 사이의 우호와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돼 있는 조선통신사도 임진왜란이란 거대한 증오와 불신의 뿌리 위에서 피어난 기적적인 화해의 역사다.

증오와 불신의 중심에 선 불상을 화해의 불상으로 만들 묘안은 없을까.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쓰시마에서 나고 자랐다는 택시기사 마에다 다케아키는 “원래 한국의 절에 있었던 것이라면 일단 돌려준 뒤 (일본의 사찰과) 얘기를 해봐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불상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쉽지 않은 길이지만 용기를 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하창고에 갇힌 불상을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결국 화해와 우호뿐이다.

쓰시마/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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