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3월25일 오후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가운데)의 권유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한-일 두 정상은 오는 11월 양국간 정상회담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 헤이그/연합뉴스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위안부 공방 3년
▶ 1951년 10월 시작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65년 6월 타결됐다. 경제개발이 절실했던 박정희 정권은 5억달러의 경제협력 자금을 받는 대가로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양국간 근본 문제를 미봉해버렸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지 벌써 23년이 지났다. 한-일 간의 지난 3년간 줄다리기 역사를 복기해보면, 위안부 문제 해결은 치열했던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타결보다 더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
‘이렇게 정리되는 건가?’
지난 19일 청와대가 “올가을 국제회의를 계기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는 내용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친서 내용을 공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안도감과 실망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인정하듯 현재 양국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위안부 문제’ 등 역사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대립이고, 이런 갈등 국면을 종식시킬 중요한 분기점은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청와대가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아베 총리의 친서 내용을 공개하고, 박 대통령이 지난 2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인권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며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삼갔으니 그동안 한번도 성사되지 못한 양국 간 정상회담이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지난 3년여 동안 이어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대립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이후 양국이 국력을 총동원해 펼친 전방위적인 외교전이었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과 세계 10위권의 신흥국이 양국의 자존심을 걸고 한판 대결을 벌였으니 그 여파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일 관계가 크게 휘청거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중국의 대한·대일 전략, 일본의 대북 전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반한 집회’(헤이트 스피치)라 불리는 엄청난 혐한 광풍이 불었다.
이명박은 도대체 왜 독도에 갔을까
이번 갈등의 의미는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서 양보할 수 없는 서로의 ‘단단한 암반’과 같은 하한선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사태는 내년이면 수교 50주년을 맞는 미래 한-일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규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의 진행 경과는 철저히 복기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가 시작된 것은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2011년 8월30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면서부터다. 이 헌재 결정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과 적극적인 외교적 교섭을 시작해야 한다는 중대한 의무를 떠안게 됐다. 이를 통해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봉인을 통해 굳게 닫혀 있던 한-일 관계의 본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된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노다 요시히코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20일 발매된 일본 <주간 동양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재임 중에 일어난 한-일 간의 공방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2011년 9월 취임한 노다 총리는 취임 후 첫 외국 방문지로 한국을 택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을 찾은 그에게 “역대 한국 정권은 임기 말이 되면 (반일이라는) 일본 카드를 꺼내 왔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은 지난 헌재 결정의 의미에 관해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두달 뒤인 12월18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마침내 정면충돌한다. 이 대통령이 예정된 정상회담의 시간을 절반 이상 사용하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인식을 달리하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큰 차원의 정치적 결단을 기대한다”고 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집권 세력은 자민당에 견줘 온건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던 민주당이었다. 노다 전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수면 아래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혜를 짜냈다. 타개안을 한국에 제안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일 공방을 자세히 보도한 <홋카이도신문> 2012년 5월12일치 기사를 보면, 사이토 쓰요시 당시 일본 관방부장관이 2012년 4월 한국을 방문해 △노다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고 △무토 마사토시 주한대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해 사죄하며 △정부 예산을 들여 보상을 한다는 안을 제시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안을 받아든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은 “위안부 지원 단체의 의향을 들어보라”며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 안으로는 한국 여론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달 뒤인 8월10일 이 대통령의 ‘화풀이성’ 독도 방문이 이어진다.
노다 전 총리는 이에 대해 “우리 안을 전달했는데 (한국에서) 반응이 없었다. 청와대에 우리 제안이 전달됐다면 이 대통령이 갑자기 독도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당시 일본 정부에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뜬금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격분한 일본은 이후 세계 무대에서 독도와 관련된 자국의 영토 주장을 강화하고, 일본 각지에서 혐한 시위가 본격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막지 못한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은 냉정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위안부 둘러싼 3년 양국관계 최악
양보할 수 없는 하한선만 확인
이번 사태는 내년 수교 50돌 맞는
미래 한-일 관계를 규정하기에
그동안 진행 경과 철저 복기해야 일본과 양자적 틀로만 문제를
풀려고만 하면 승산은 없어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에 근거해
세계 여론과 일본을 설득해 가는
장기적이고 원대한 비전 필요 박근혜는 처음부터 ‘낙동강 전선’서 시작 그러나 양국 간 물밑 절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물밑 협상에 관여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 월간지 <세카이>(세계) 9월호에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관계가 험악해진 절박한 상황에서 양국이 최후의 노력을 했다”고 적고 있다. 즉, 사이토 관방부장관이 10월28일 도쿄에서 이동관 대통령 특사와 만나 △한-일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정상회담 공동 코뮈니케로 발표하고 △문언에 ‘도덕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빼고 ‘국가나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며 △일본 대사가 피해자를 방문해 사죄문·사죄금을 건네고 △제3차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공동 연구를 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노다 총리가 최후의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첫째 안에는 한국이, 이를 인정한 둘째 안은 일본이 반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의 민주당 정권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하한선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12월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아베 정권이 등장한다. 아베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아베 총리는 취임 전부터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와 일본이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해 주변국들에 큰 피해를 줬음을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난해 12월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미국으로부터 “실망했다”는 굴욕적인 반발을 사게 된다. 이에 맞서 2013년 2월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경색된 한-일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일본의 성의 있는 선조처를 요구했다. 이명박-노다 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놓고 ‘38선 부근’에서 대치했다면, 박근혜 정권은 고노 담화 등을 수정하겠다는 아베 정권에 맞서 취임 초부터 ‘낙동강 전선’ 사수에 내몰린 셈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정권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당시 <산케이신문>은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 16명을 상대로 기록한 증언록을 입수해 증언에 허점이 많다는 점을 들어 “역사적인 자료로 사용하기 힘들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월2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공식 선언한다. 그 시점에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던 미국이 개입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월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며 사실상 일본에 대한 압박에 나선 것이다. 결국 아베 총리는 3월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내각에서 이것(고노 담화)을 수정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고노 담화를 수정했다간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심대한 인권침해로 인식하고 있는 미국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 하원은 2007년 7월 만장일치로 “일본 정부가 젊은 여성들을 강제 성노예로 만든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넘을 수 없는 한국 쪽의 하한선으로 ‘고노 담화’가 확인된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스스로의 힘이 아닌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이후 일본에선 고노 담화를 큰 틀에서 유지시키기 위한 사후 조처가 이어진다. 아베 정권은 6월20일 애초 예고했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공방의 경위’라는 제목의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의 성격에 대해 한국에선 “고노 담화를 부정하려는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일본에선 오히려 “고노 담화를 아슬아슬하게 살려낸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보고서가 그동안 일본 우익들이 고노 담화를 공격하며 내걸었던 여러 논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보고서는 내용의 3분의 1 정도를 고노 담화가 나온 뒤 일본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인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처음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한 여성기금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강조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 있는 선조처를 요구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무력화하려는 치밀한 구성으로 해석된다. 이후 스가 관방장관은 “고노 담화를 수정하라”는 자민당 내 일부 압력에 대해 “고노 담화를 수정할 의사가 없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조처를 내놓을 의사도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 밝히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3년 동안의 길고 긴 터널을 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찌 보면 위안부 문제는 이 대통령이 호언한 대로 “일본 정부가 인식을 달리하면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닌, 해방 후 69년이 지나도록 진정한 화해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한-일 관계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심연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11월 정상회담에서 “유보” 결론 가능성 이제 남은 것은 박 대통령의 결단이다. 박 대통령이 11월 아베 총리를 만난다면 위안부 문제가 사실상 ‘유보’ 쪽으로 결론이 남을 듯하다. 이 경우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만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직접 촉구한다”는 논리를 구사하겠지만, 아베 정권이 한국이 납득할 만한 조처를 내놓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리고 대부분 고령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유보’는 사실상 위안부 문제 해결의 포기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만나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의 냉각기는 좀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이 이어질 것이고, 양국 관계 악화를 통해 감수해야 할 국익의 손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한국 보수 정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친일성을 고려해볼 때 결국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만나는 쪽으로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3년의 교훈은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양자적 틀로만 문제를 풀려 했을 때 승산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근거해 세계 여론과 일본을 설득해 가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밟아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에 그런 장기적이고 원대한 비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양보할 수 없는 하한선만 확인
이번 사태는 내년 수교 50돌 맞는
미래 한-일 관계를 규정하기에
그동안 진행 경과 철저 복기해야 일본과 양자적 틀로만 문제를
풀려고만 하면 승산은 없어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에 근거해
세계 여론과 일본을 설득해 가는
장기적이고 원대한 비전 필요 박근혜는 처음부터 ‘낙동강 전선’서 시작 그러나 양국 간 물밑 절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물밑 협상에 관여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 월간지 <세카이>(세계) 9월호에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관계가 험악해진 절박한 상황에서 양국이 최후의 노력을 했다”고 적고 있다. 즉, 사이토 관방부장관이 10월28일 도쿄에서 이동관 대통령 특사와 만나 △한-일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정상회담 공동 코뮈니케로 발표하고 △문언에 ‘도덕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빼고 ‘국가나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며 △일본 대사가 피해자를 방문해 사죄문·사죄금을 건네고 △제3차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공동 연구를 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노다 총리가 최후의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첫째 안에는 한국이, 이를 인정한 둘째 안은 일본이 반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의 민주당 정권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하한선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12월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아베 정권이 등장한다. 아베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아베 총리는 취임 전부터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와 일본이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해 주변국들에 큰 피해를 줬음을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난해 12월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미국으로부터 “실망했다”는 굴욕적인 반발을 사게 된다. 이에 맞서 2013년 2월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경색된 한-일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일본의 성의 있는 선조처를 요구했다. 이명박-노다 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놓고 ‘38선 부근’에서 대치했다면, 박근혜 정권은 고노 담화 등을 수정하겠다는 아베 정권에 맞서 취임 초부터 ‘낙동강 전선’ 사수에 내몰린 셈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정권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당시 <산케이신문>은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 16명을 상대로 기록한 증언록을 입수해 증언에 허점이 많다는 점을 들어 “역사적인 자료로 사용하기 힘들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월2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공식 선언한다. 그 시점에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던 미국이 개입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월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며 사실상 일본에 대한 압박에 나선 것이다. 결국 아베 총리는 3월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내각에서 이것(고노 담화)을 수정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고노 담화를 수정했다간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심대한 인권침해로 인식하고 있는 미국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 하원은 2007년 7월 만장일치로 “일본 정부가 젊은 여성들을 강제 성노예로 만든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넘을 수 없는 한국 쪽의 하한선으로 ‘고노 담화’가 확인된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스스로의 힘이 아닌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이후 일본에선 고노 담화를 큰 틀에서 유지시키기 위한 사후 조처가 이어진다. 아베 정권은 6월20일 애초 예고했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공방의 경위’라는 제목의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의 성격에 대해 한국에선 “고노 담화를 부정하려는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일본에선 오히려 “고노 담화를 아슬아슬하게 살려낸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보고서가 그동안 일본 우익들이 고노 담화를 공격하며 내걸었던 여러 논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보고서는 내용의 3분의 1 정도를 고노 담화가 나온 뒤 일본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인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처음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한 여성기금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강조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 있는 선조처를 요구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무력화하려는 치밀한 구성으로 해석된다. 이후 스가 관방장관은 “고노 담화를 수정하라”는 자민당 내 일부 압력에 대해 “고노 담화를 수정할 의사가 없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조처를 내놓을 의사도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 밝히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3년 동안의 길고 긴 터널을 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찌 보면 위안부 문제는 이 대통령이 호언한 대로 “일본 정부가 인식을 달리하면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닌, 해방 후 69년이 지나도록 진정한 화해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한-일 관계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심연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11월 정상회담에서 “유보” 결론 가능성 이제 남은 것은 박 대통령의 결단이다. 박 대통령이 11월 아베 총리를 만난다면 위안부 문제가 사실상 ‘유보’ 쪽으로 결론이 남을 듯하다. 이 경우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만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직접 촉구한다”는 논리를 구사하겠지만, 아베 정권이 한국이 납득할 만한 조처를 내놓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리고 대부분 고령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유보’는 사실상 위안부 문제 해결의 포기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만나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의 냉각기는 좀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이 이어질 것이고, 양국 관계 악화를 통해 감수해야 할 국익의 손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한국 보수 정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친일성을 고려해볼 때 결국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만나는 쪽으로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3년의 교훈은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양자적 틀로만 문제를 풀려 했을 때 승산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근거해 세계 여론과 일본을 설득해 가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밟아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에 그런 장기적이고 원대한 비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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