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남성이 “집단적 자위권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도쿄의 히비야공원. 도쿄 /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잘 모르겠는데요.”(60대 환경미화원)
“저 반대쪽 다리 근처라는 얘긴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경시청에 문의하시죠.”(50대 경찰관)
11일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히비야 공원. 남자의 죽음은 만 하루가 채 못돼 사람들의 기억에서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공원에선 1일부터 시작된 도쿄도 관광국화대회가 한창 진행중이었고, 낮 시간 소풍을 나온 학생들과 도시락을 든 직장인이 군데군데 모여 앉아 밝게 수다를 떠는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다. 흐린 날씨인데도 밝게 웃는 시민들로 인해 공원엔 미묘한 청량감이 감돌았다.
공원에서 만난 청소원, 경찰, 노숙자로 보이는 60대 노인 등 4~5명에게 알음알음 물어가며 남자가 분신 자살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비야 공원에서 북서쪽에 치우쳐 있는 ‘건강 광장’(겐코 히로바)의 계탑 앞이었다. 광장 바닥은 전날 분신 사건을 감추려는 듯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지만, 군데군데 남은 그을림 자국과 청소 과정에서 얇게 걷어낸 모래 바닥을 통해 이곳에서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2일치 일본 언론의 보도를 보면, 전날인 11일 오후 6시55분께 히비야 공원에서 ‘불이 났다’는 119신고가 접수됐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남성을 발견했다. 소방대원들이 곧바로 불을 끄고 남성을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곧 숨지고 말았다.
이 남성은 도쿄 관청가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에서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단서는 그가 남긴 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사히신문>은 주검 옆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일본 국회의) 중의원과 참의원 의장 앞으로 보낸 항의문이 떨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일본 경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그 안에 “(아베 정권이 7월 각의 결정을 통해 통과시킨)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과 미 해병대가 사용하고 있는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하는 방침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자신이 숨지는 과정을 세상에 남기려는 듯 자살을 결행한 장소 옆 벤치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해 뒀다.
일본에선 지난 7월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 해석을 변경한 뒤, ‘일본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중이다. 그 영항인 듯 지난 6월 말에도 도쿄 제이아르(JR) 신주쿠역 앞에서 63살 남성이 “집단적 자위권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친 뒤 분신자살을 시도한 바 있다.
이 남성이 자살한 11일 밤에도 7000여명의 시민들이 일본 국회 주변에서 모여 집단적 자위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 전체의 관심은 매우 낮은 편이다. 12일치 신문을 보면 남성의 자살도, 대규모 집회도 신문 구석의 단신으로 처리돼 자세히 신문을 살피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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