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균씨. 사진 길윤형 특파원
[짬] 재일동포 강우규씨 아들 강상균씨
서울 근무중 부친 주범몰려 사형수로
88년 석방…2007년 고문후유증 별세 쉰살때 태어난 늦둥이 막내아들 상균씨
5살때부터 ‘사형수 아들’ 아픔 가득
지난달 고법 재심 ‘무죄’ 받아 한풀어 그렇다 해도 강씨의 마음에 남은 모든 ‘어둠’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어처구니없는 누명의 굴레 속에서 그와 가족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이 원상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7년생인 강씨는 부친이 나이 쉰에 낳은 늦둥이였다. 부친은 제주도 출신으로 16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스무살 때 일터에서 한쪽 다리를 다쳐 의족을 끼고 생활했다. 그는 “아버지와는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은데다 민감했던 청소년기에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속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부친은 72년 같은 제주도 출신이 서울에 설립한 대영플라스틱에 감사로 취직해 귀국했다. 강씨 다섯살 때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인 77년 1월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유신이 마지막 발악을 위해 자고 나면 간첩 조작사건을 양산해 내던 시점이었다. 강우규는 석방 뒤 89년 7월 자신에 대한 구명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의 모임 회보인 <구원회 소식지>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77년 2월 서울 아파트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경찰이 신발을 신고 들어와 남산의 지하 취조실로 연행해 갔다. 1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때리고 발로 밟고 잠도 계속 자지 못했다.” 도쿄에 남겨진 그에게 모친 강화옥(94)씨는 “아버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만 말했다. 사실 모친도 영문을 몰랐기 때문에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강씨는 “당시는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다. 아버지를 위해 구명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활동을 보며 조금씩 상황을 이해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그에게 부친은 지우고 싶은 존재였다.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로 일상적인 차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사형수 아들’이라는 또 다른 낙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17살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그에게 울면서 “일본 영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를 속이면서 사귀고 있는 게 아니냐”(해방 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자이니치와 그 후손들에겐 특별영주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했고, 고등학교 때 생활지도 교사는 일상적으로 “식민지 인간이었던 사람이…” 따위의 말을 입에 올렸다. 그는 “내 안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과 타산적인 생각이 들어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고립이 이어졌다. 결국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친에 대한 구명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언론사들이 어린 강씨와 인터뷰하려고 찾아오곤 했다. 그는 “어린이의 모습이 방송에선 잘 먹히지 않나. 그림을 따기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우리 아빠가 사형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극렬히 도망쳐 다녔다”고 말했다. 88년 서울올림픽 특사로 마침내 석방된 부친을 맞으러 나리타 공항에 가면서도 “‘기자들이 올 텐데 이 사실이 밝혀지면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돌아온 부친은 지난 일들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강씨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한국과 한국 정부에 대한 감정을 묻자 “아버지나 어머니는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나는 동포들 속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던 게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엔 재판 관계로 두번 갔는데 그 일이 없었다면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일본으로 국적을 옮긴 상태다. 부친은 이따금 혼자 잠결에 “빠가야로, 빠가야로”(바보 같은 놈)라고 말하곤 했다. 부친은 “누가 바보냐”고 묻자 “내가 바보”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이미 자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평생 마음의 집을 지고 살았던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부친은 돌아왔지만 고문으로 몸이 상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어머니가 카페, 레스토랑을 경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생했던 어머니가 납득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병원에서 임종 직전 아버지에게 한국에 대한 감정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는 가족애보다는 조국애나 친구나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 큰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억누른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그의 마음속에 설명되지 않는 분노가 언뜻 번뜩이다 사라졌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될까요?”(아들) “그러게,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을 내가 보고 싶었구나.”(아버지)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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