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래 동진회 회장
일본, 포로감시 조선인 3천여명 동원
연합군 전범 재판서 129명 유죄 판결
90살 이학래 회장, 평생 해결 촉구
일본, 편의적으로 일본인·조선인 취급
요코미치 의원 “일본이 해결해야”
연합군 전범 재판서 129명 유죄 판결
90살 이학래 회장, 평생 해결 촉구
일본, 편의적으로 일본인·조선인 취급
요코미치 의원 “일본이 해결해야”
“(일본의) 전후 7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이 된 올해엔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이학래(90·사진) 동진회 회장은 몇년 새 많이 기력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왼손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발걸음이 느렸고 총기 넘치던 예전과 달리 주변인들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을 걸고 해결을 촉구해 온 한국인·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얘기가 나오자 딴 사람처럼 변했다. 1일 도쿄 중의원 제2의원회관 1층에서 열린 ‘동진회 결성 60년 기념행사’에 참여한 이 회장은 현장에 설치된 43장의 패널을 하나하나 돌며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하려 애썼다. 패널엔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부터, 1942년 5월 일본의 포로 감시원 모집, 이후 연합군의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선인 비시급 전범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조선인 비시급 전범 문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두면서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붙잡은 많은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3012명)들을 동원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최말단의 도구로 이용됐던 이들 가운데 이 회장 등 129명이 이후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징역형을 받고 출소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범’ 또는 ‘친일파’라는 사회의 냉혹한 시선이었다. 이들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돼 일본 국적이 박탈된 탓에 일본인 군인·군속에게 지급됐던 원호법, 은급법 등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과정에서 허영(1955년)·양월성(1956년) 등 2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생 동안 비시급 전범의 문제를 연구해 온 우쓰미 아이코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 대표는 “일본 정부는 이들이 처벌될 땐 일본인 취급을 했다가, (원호 등의 문제에선) 편의적으로 조선인 취급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대응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이들이 1955년 4월 당시 일본 전범이 수용돼 있던 도쿄 이케부쿠로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동진회를 결성해 오늘로 60년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2008년 5월 피해자 또는 유족 한 사람에게 300만엔의 보상적 성격을 갖는 특별교부금을 지급하라는 법안을 만들어 일본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2009년 7월 국회가 해산되면서 법안은 폐안됐다.
한국 정부는 2006년 6월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명예회복 조처는 취했지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지난해 10월 헌법소원을 당한 상태다.
요코미치 다카히로(민주당) 의원은 “이 문제는 일본이 법안을 만들어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이학래 회장이 건강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되도록 여야당의 협력을 얻어 다시 한번 법안을 제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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