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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아베 총리도 박 대통령도 선택적 기억만…국민에 불행한 일”

등록 2015-06-14 20:50수정 2015-06-15 10:07

지난달 29일 도쿄 미나토구 시나가와의 한 회의실에서 문정인(왼쪽) 연세대 교수, 이노구치 다카시(가운데) 니가타현립대 총장,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가 악화된 한-일 관계를 개선할 방안을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지난달 29일 도쿄 미나토구 시나가와의 한 회의실에서 문정인(왼쪽) 연세대 교수, 이노구치 다카시(가운데) 니가타현립대 총장,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가 악화된 한-일 관계를 개선할 방안을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수교 50돌 새 한-일관계 탐색] (5) 한일관계 진단과 해법
전문가 좌담
올해는 해방 70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지만,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 수준으로 악화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고, 22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도 썰렁한 분위기에서 진행될 전망이다. 해방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한-일 관계는 어떻게 발전해왔고,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방안은 무엇일까. 지난달 29일 도쿄 시나가와의 한 회의실에서 양국 최고의 전문가들인 문정인(64) 연세대 교수, 오코노기 마사오(70) 게이오대 명예교수, 이노구치 다카시(70) 니가타현립대 총장(도쿄대 명예교수) 등이 지혜를 모아봤다.

문정인
“1965년 한일협정은
한국경제발전 도움됐지만
위안부·징용문제 등 빠진
불완전한 조약”

오코노기
“조약 어디에도
‘반성’ ‘사죄’ 표현 없어
일본은 한국 병합 사죄할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

이노구치
“박정희 정권이
‘나쁜 일본인’들과 타협 선택
김종필은 반 일본인 같아
타협 불가피하다는 것 알아”

왼쪽부터 문정인 연세대 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이노구치 다카시 니가타현립대 총장
왼쪽부터 문정인 연세대 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이노구치 다카시 니가타현립대 총장
문정인(이하 문) “올해는 한일이 국교정상화를 이룬 지 50년이 되는 해다. 두 분은 1945년생으로 한국말로는 ‘해방둥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되며 시작된 지난 전후 70년의 역사에 대한 감회로부터 얘기를 풀어보자.”

오코노기 마사오(이하 오코) “일본말로는 슈센코(終戰子)라고 한다(웃음). 양국이 일한협정을 통해 이룩한 지난 50년을 나는 기본적으로 성공한 관계였다고 본다. 최근 2~3년 동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곤란도 사실 성공한 뒤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와 같은 측면이 있다. 즉, 냉전이 종식되고, 포스트 냉전도 끝난 상태에서 일한 두 나라가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 있고, 거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 더 말하자면 우리가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든다. 일한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일한협정 50년 이후의 시대를 생각할 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발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시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지난 3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매우 재미있는 얘길 했다. 현재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문제는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1955년까지 10년 동안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도 인간 감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우경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노구치 다카시(이하 이노) “(아베 총리에겐) 역시 어려운 일이다. 먼저 그는 당시 태어나지(아베 총리는 1954년생이다) 않았다(웃음). 또한 그는 어릴 때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는 그가 쓴 자서전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식민지 시대의 것들만 쓰고 있다. 이는 역시 상상력의 문제일뿐 아니라 (둘 다) 정치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쓸지를)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다. 일한 두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이런 매우 선택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불행한 일이다.”

오코 “그런 점에서 (나와 아베 총리 사이의) 10년 간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라 생각된다. 즉, 우리 세대는 직접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할아버지가 고생한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또 가난했던 일본이 풍요롭게 성장하는 과정도 봤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있었던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느끼고, 알고 있다.”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에서부터 얘길 해보자. 한반도의 분단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의 결과 아닌가. 소련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미국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미국이 38도선 이남을, 소련이 38도선 이북을 점령하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결국 미국이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 분단이라는 악수를 두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코 “(한반도의 분단은) 일본의 탓은 아니잖나…물론 그 전에 식민지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과 관련된 일본의 책임은 매우 간접적이었고, 역시 미소에 의해 분단이 된 것이다.”

이노 “그 전에 해방된 한반도에서 누가 ‘우두머리’가 될 것인가를 두고 (강대국들 사이에) 복잡한 논의가 이뤄진다. 그리고 유엔(UN)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안이 나오지만, 남북 전체가 반대하고 결국 남북이 각각 독립하게 된다.”

오코 “최근 전쟁기에서 해방에 걸친 시대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하는 중이다. 가장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은 역시 원폭의 개발이다. 원폭이 개발되고 투하에 이르는 시기와 타이밍이 매우 미묘해 한반도의 분단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만약 원폭의 개발이 1~2개월 늦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이 들어와 다 점령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1~2개월 앞섰다면 소련이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50년 1월에 나온 애치슨 선언(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선언) 이다. 일본을 위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또 극동 방어선을 오키나와까지 내려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미일 협력 때문에 한반도가 비극적 운명을 맞았던 게 아닌가 한다”

이노 “그런 면은 있겠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원폭과 오키나와 전쟁에서 미군이 경험한 일본군의 광기 어린 전투능력이었다. 미국은 미군이 조선에 상륙해도 똑같은 저항이 있을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 상륙을 두려워했다.”

“화제를 돌려 한일협정 얘기를 해보자. 오코노기 선생은 한일협정에 대해 논의하며 ‘65년 체제’(한일 국교 정상화로 형성된 새로운 한일관계)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65년 체제를 통해 한일은 국교정상화를 할 수 있었지만, 과거 역사 문제를 다루지 않는 등 조약 자체는 사실상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65년 체제에 대해 다시 한 번 평가를 한다면.”

오코 “65년 체제는 결국 냉전과 개발 즉 안전보장과 한국의 경제개발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가진 체제였다. 게다가 그 체제의 성립은 일한간의 어려운 교섭의 결과 나온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노 “대단한 타협이었다. 일한 양쪽 모두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매우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오코 “그렇다. 분명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화해의 산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선 김종필 전 총리를 포함해 국교정상화 회담에 관여한 인물들이 만약 그때 한국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지 않았다면 경제발전의 호기를 놓쳐,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한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선 일본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두 개의 시각이 있다.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제 시기 자본주의가 한반도에 도입됐고 인프라 투자 등이 이뤄져 경제가 발전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 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자금을 기초로 수출산업화 전략 등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경제가 발전했다는 입장이다.”

오코 “역시 당시 타이밍이 매우 좋았다. 세 가지가 겹쳤다. 하나는 국교정상화로 일본의 자금과 기술이 들어왔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박 정권이 수출지향형 경제발전이라는 새로운 경제개발 전략을 찾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본, 기술, 시장, 발전전략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60년대 후반 한국에서 절묘하게 겹쳤다. 그 타이밍을 놓쳤다면 한국의 경제 발전이 불가능했다고는 말하긴 힘들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한다.”

이노 “일한은 일한협정 체결 이후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dependent)된 게 아니라, 결합된 발전(associated development)을 했다. 그때 박 정권은 ‘나쁜 일본인’들과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타협을 선택할 용기가 있었다. 싫은 것이었지만 이를 하지 않으면 한국이 자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일협정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공헌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일협정에선 위안부 문제나 조선인 강제노동 등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등의 문제는 이미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이 됐기 때문에 이를 다시 문제 삼는 한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오코 “(강제동원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은 것은) 일본의 잘못이다. 일한협정의 교섭을 담당한 일본인은 전쟁 전의 일본인이었다. 그들의 머리 안에는 낡은 조선의 이미지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조약을 보면, 신기하게도 조약과 그에 부속된 협정을 다 봐도 ‘반성’이나 ‘사죄’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게 전쟁 전의 인간과 전후의 (나 같은) 사람과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협정 체결을 할 때 갖고 있던 입장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결정된) 옛 조약은 모두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는 것이었다. 즉 옛 조약은 조선왕조의 승인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 합법적이라면 식민지배도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옛 조약의 합법, 불법성 문제는 다케시마(독도) 등을 포함해 뒤로 미뤄졌기 때문에 나중에 이런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노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한일협정 체결까지) 20년 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일본은 (전쟁 전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반성도 없었다.”

오코 “지적한 청구권 협정에 대해 말하자면, 일본인과 한국인의 법률관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냉전이 끝나고 (한국이) 민주화되며 양쪽의 전통문화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일본인의 전통문화는 역시 사무라이의 문화다. 사무라이 문화에선 법률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는 당시 일본 외교관들은 노련하게 교섭했고, 한국의 외교관은 실력이 모자랐다는 애기도 되나?”

오코 “(그보다는) 역시 국력의 차이였다. 한국 외교관들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자금이 필요했다. 일본이 완고하게 ‘노’라고 하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노 “김종필 같은 인물은 반 이상 일본인과 같았다.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어로 말하면 일본인의 마음을 잘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이 대단한 것이라 본다. 이 이상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본의 조건 가운데 한국에 좋은 게 뭔지에 초점을 맞춰 잘 생각을 했다. 사무라이처럼 깔끔하게 결심한 것이다.”

“한국이 독립을 했다지만 당시 교섭에 참가했던 김종필 같은 이들은 식민지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참가했고, 일본은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에서 교섭한 것 아닌가. 거기에 일본은 경제적 지원이라는 지렛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2012년 5월 한국의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낸 데 대해 한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일본 내 일부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오코 “일본인의 감각에선 그렇다. 청구권 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명기돼 있는데 왜 반복되고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노 “그렇다. 정부 간 교섭에서 결론이 났는데 이제 와 뭘 말하는 거냐는 얘기다.”

오코 “그러나 반대로 한국인은 이는 힘이 약할 때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대등한 조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일본과 한국의 법문화가 다르다. 일본은 사무라이의 문화니까 내용은 묻지 않는다. (사무라이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는데) 내용이 불평등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 문화는 유교와 주자학의 문화기 때문에 ‘뭐가 정의롭나’가 문제가 되고, 내용이 중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별 청구권을 인정한 것에 대해 일본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오코 “징용이나 위안부 문제는 법률로 해결하는 것은 무리다. 이를 해결하려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갈 수밖에 없다.”

이노 “역시, 정부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의견을 모아야 한다. 양쪽이 모두 시민사회를 넣어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얘기가 정리되지 않는다. 화해조차 가능하지 않다. 이런 문제들은 일한의 틀이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로 일한이 이니셔티브를 갖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문정인
“식민지배 역사는
앞으로도 갈등 원인 될 것
갈등 있더라도 만나서
협력 위해 노력해야”

이노구치
“양국 정부·시민사회가
축구나 빈민국 지원 같은
국제적으로 의미있는 일
함께 하는 것이 좋아”

오코노기
“미국이나 중국이
아·태 질서 만든다고
생각해선 안돼
그 안의 나라들이 만드는 것”

“이제 1998년 체제에 대해 얘기를 하자. 오코노기 선생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내놓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한일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코 “98년 체제라는 것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이 옛 조약의 합법정통론을 수정하게 된다. 이는 냉전이 끝나고 국제협조의 시대에 맞춰 일본 안에서 리버럴한 자사연합(자민당-사회당 연정)이 있었고, 자민당 안에서도 리버럴한 정권이 무라야마 담화에 기초해 한국과 협상을 한 결과 나온 것이다.”

이노 “마침 한국도 김대중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딱 좋았다. 매우 훌륭했다.”

오코 “그래서 성공했다. 보통, 시대의 변화에 이렇게 능동적으로 대응하긴 어렵다.”

“98년 체제에선 역사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뤄 65년 체제에서 다루지 않았던 문제를 공식화하고 일본이 이를 인정했다. 또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선상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오코 “어떤 의미에서 98년 체제는 과거의 65년 조약을 수정한 것이다. 타협이었던 것을 화해와 가까운 지점까지 수정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론 성공하지 못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해 국회 연설을 하고 일왕과 만났을 때 당시 일본인들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가졌다. 또 당시 김 대통령은 한국 내의 반발에도 일본 문화 수입을 자유화했다. 그게 일본에서 한류가 확산하게 된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양국 관계가 다시 이렇게 나빠진 것일까.”

오코 “당시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양국 모두에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에 크게 감사했다. 그래서 한류나 월드컵 공동 개최 등이 가능했던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일본인이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쭉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류 붐으로 인해) 그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믿기 힘들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이노 “그러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상한 변수가 나타난다. 하나는 그 무렵 시작된 중국의 대두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해 해마다 10% 넘는 성장을 시작한다. 동시에 북한이 쇠퇴하고 북핵 문제가 불거진다. 북한과 중국은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나라다.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먹는다면 베이징을 노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조용히 깨닫게 됐다. 그로 인해 중국도 북한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치열하게 6자회담을 진행한다. 그러나 북한이 말을 듣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나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또 일본에선 납치 문제라는 어려운 문제가 터져 나온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 다시 반한, 반북 등의 흐름이 생겨났다.”

“98년 체제에서 오부치 총리는 김 대통령의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김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2002년 9월 방북했을 때 이를 지지했다. 그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2004년 2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에 외교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내고 한국 국민의 대일 감정도 나빠졌다. 한편 일본에선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문제가 큰 계기가 된다.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어떻게 보나.”

이노 “(그보단) 역시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컸다. 그게 결국 (납치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대두되는 등) 뜻하지 않은 사태로 전개된다. 또 미국에선 조지 부시 대통령이 출현하게 된다. 그로 인해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돼)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그로 인해 김 대통령의 남북대화 이니셔티브(햇볕정책)가 조용히 몰락해 갔다. 고이즈미의 대북 이니셔티브도 좋은 것이었지만 납치문제에 매몰돼 결국 실패했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오코 “ 고이즈미의 방북 실패가 매우 아쉬운 것이었다. 이것은 일북관계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고이즈미가 방북한 것은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지만, 평양선언은 일북 국교정상화에 대한 것이었다. 정상화와 납치문제를 교환하려고 한 것이다.”

이노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관점을 단번에 바꾸려 한 것이다.”

오코 “이게 가능했다면 98년 체제는 진정한 체제가 됐을 것이다.”

“아·태 질서 재편, 한국-일본이 함께 할 역할 있다”

[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것은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었다. 청와대에서 들은 얘기론 2011년 12월 교토에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진행한 교섭이 결렬돼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오코 “최종적으로 교섭은 잘 진행되지 않았지만, 수면 아래서 여러 가지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노다 정권은 거의 말기 상태였기 때문에 그 교섭 자체가 정말로 정권을 건 교섭이었는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거기서 얘기가 어느 정도 모아졌다고 해도 그것을 정말 실행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한일 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나.”

오코 “(한일관계가 악화된) 지난 3년은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왜 독도에 갔는지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 무렵 형인 이상득 의원의 스캔들이 있었고. 여러 (국내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왜 그 타이밍에 독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모두 한일 관계엔 좋은 영향을 줬다곤 말하기 힘들다. 이 가운데 한일관계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정권은 어느 쪽인가? 순위를 매겨달라.”

오코 “(잠시 고민한 뒤) 박근혜 정권이다. 지금의 문제는 김대중-오부치의 역 패턴이다. 시대가 변화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할 시기에 쌍방의 리더십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 아베 총리는 아베 총리대로 과거에 매달려 있고. 박 대통령도 역사 문제에만 집착한다. 두번째는 이명박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 때도 좋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은 단기적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이명박 정권은 모두 보수 정권이다. 보수 정권은 기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뭘까?”

이노 “한국 시민사회의 영향이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달성돼 1인당 국민소득이 커지고, 기술수준도 높아지고, 세계에서 한국의 지위도 매우 높아졌다. 그래서 (한일관계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다는 움직임이 나왔다. 이명박 정권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에 외교적인 노력을 펴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2011년 8월 헌법재판소의 결정 등의 영향으로 시민운동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게 됐다.”

“아베 정권이 집권한 뒤 역사수정주의가 대두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점령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약육강식의 질서에서 일본이 한 일은 지극이 당연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나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오코 “서로가 상대의 전통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문화가 표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의 문화는 상당히 특별하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할 때 ‘나는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그 하나가 주자학적인 전통문화다. 정의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프라이드가 강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셔널리즘이다. 보통 선진국이 되고 경제가 발전하면 내셔널리즘은 약화되지만 한국은 분단국가다. 분단국가의 내셔널리즘은 간단히 잦아들지 않는다. 일본인도 역으로 일본 문화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모두 ‘일한협정을 맺었으니 모든 게 해결됐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인의 문화적인 특수성도 있지만, 최근 일본에서 역사수정주의적인 생각에 동조하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날 수 있다.”

오코 “그들이 그렇게 많아진 것은 중국과 한국의 탓이라고 생각한다(웃음). 그것은 일본의 내셔널리즘이기 때문에.”

이노 “일본의 문화는 타자의 비판에 매우 약하다. 한국인은 비난할 의사가 없고, 그저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일본은 싫다고 느끼게 된다. 상처를 받고 마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도 있다. 이와 관련해선 세가지 쟁점이 있다. 하나는 강제성에 대한 부인이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선 성노예라는 표현이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로 바뀌었다. 조선인 중간 상인이 가난한 농촌 여성들을 사서 팔았다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는 대목이다. 두번째는 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과거 문제가 해결됐는데 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느냐는 것이다. 세번째는 비례성의 문제다. 예를 들어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해도 그 숫자는 미미한데 그 것을 과도하게 정치화 한다는 주장이다.”

이노 “정치가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혐한, 혐중파가 늘어나는 시기에 총리나 관료가 되면 이를 어떻게든 반영하는 행동을 취하게 마련이다.”

“최근 일본의 1만명 이상의 역사가와 해외의 지일파 역사학자들이 아베 정권의 위안부에 대한 대응 자세를 비판했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가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코 “그 사람의 신념이다. 위안부 문제는 역시 해결해야 한다. 70년 담화의 내용이 한국인이 바라는 것처럼 나올지와 별개로 70년 담화가 공개된 뒤엔 (역사 문제와 관련된) 초점이 조금씩 흐려지고 애매하게 축소돼갈 것이다(아베 정권이 8월 이후 역사 문제에선 조금씩 손을 떼 갈 것이란 의미).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현재 (그 때문에) 정상회담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위에서 정상회담이 되지 않는데 밑에서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 70년 담화를 둘러싼 역사 마찰이 수습되고 난 뒤에 일한의 관민이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995년 설립됐던) 아시아여성기금의 확대판과 같은 것을 구성해서 일한 공동으로 이를 세계에 발표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일한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다른 분야의 협력을 위한) 시범 케이스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노 “역시 위안부 문제는 세계에서 중요한 ‘젠더 이슈’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선 일본이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유엔(UN)에서 이와 관련된 ‘밀레니엄 젠더 목표’(MGG) 등의 목표치·달성치 등을 정해 2025년, 2050년까지 모든 나라가 달성을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안보 정책으로 얘길 돌리자. 아베 총리가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것을 내걸고 있다. 한국에선 이에 대해 적극적 평화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전쟁주의가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일본의 정치체제가 군국주의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은 한국에게 193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노 “그것은 매우 과장된 주장이다. 아베 총리가 실제 하려는 것은 매우 작은 것이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미국이 현재 힘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국이 곤란해 하고 있는 이상 일본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세계가 혼란하고 예측이 쉽지 않게 되고 있다. 지금부터 입법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 담기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가이기 때문에 말은 크게, 행동은 신중하게 (할 것이다). 일본은 어찌됐든 관료들이 중간에서 쥐고 있기 때문에 좀 자세히 읽으면 ‘뭐야 대단한 게 아니잖아’라는 내용을 알게 된다.”

오코 “일본은 중국의 해양진출에 대해선 매우 우려한다.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라는 의미로 현재의 안보정책이 나오는 부분이 크다고 본다. 집단적 자위권은 1930년대로 돌아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볼 때 불안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는 것은 아니다. 이를 추진하는 사람이 역사수정주의자로 의심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에선 한국도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인식이 일본에서 넓게 퍼져 있나?”

 오코 “지금 중요한 것은 일한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설명할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노 “지금은 그렇다. (게다가) 외무성이 최근 일한은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한 이웃 나라라는 표현을 올해 <외교백서> 등에서 뺐다. 일본이 이런 일을 하면 외교적인 센스가 없다고 의심을 받게 된다. 외교에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중요한 레버리지인데 이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오코 “일한 두 나라의 공동의 이익이 뭘까를 다시 생각해 보면,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한다는 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양국 간의 공통의 이익을 어떻게 지켜갈까. 그것은 역시 시장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기본적인 가치이고, 이를 등에 업은 국제협조주의가 된다.”

 “8월15일에 아베 담화가 나온다. 여기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 것이라 예상하며. 규범적으로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나.”

오코 “이번 미 의회 연설과 비슷한 내용이 될 것이라고 본다. 반성은 들어가지만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는 전체적으로 이어가겠다는 (내용은 포함되는) 패턴일 것이다.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가 들어가지 않으면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 만약 직접 조언을 한다면.”

 오코 “역시 70년 담화를 내려면 전후 70년의 얘기 뿐 아니라 그 이전의 메이지 시대(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한 시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해야 한다. 그걸 안 하려면, 애초 담화를 안 내면 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한다면 메이지 이후의 것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이노 “별로 대단할 게 없는 일본이란 나라가 지금까지 오는데 매우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식민지 등의 문제도 그렇지만 일본 국민들에게 큰 희생을 강요해 왔다.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반성한다는 것을 넣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일관계를 지금부터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노 “간단하다. 정부, 시민사회, 학자들도 서로 좀 더 마을을 열고 대화를 해야 한다. 양국은 가까워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다. 그 부분에서 노력이 좀 부족했다. 가장 좋은 것은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는 것이다. 축구(월드컵 공동개최) 같은 놀이를 통해서도 좋은 일이 정말로 많이 있었다. 세계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서로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하는 게 좋다”

 오코 “상호학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공통의 분모를 찾아야 한다. 일한은 세계사에서 공통으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시대는 절대 피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일본과 한국이다. 아시아-태평양의 질서는 미국이나 중국이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선 안 되고 그 안에 있는 나라들이 만들어 가야 한다.”

  “예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 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잊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도 늘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다른 한쪽에선 대화와 협력의 노력을 만들어 간다면 결국 긴 시간이 지나 한일간의 역사 갈등도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로 갈등이 있더라도 만나서 얘기 하고 협력의 토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정리 길윤형 기자, 허원영 게이오대학 박사과정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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