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헌화할 것으로 보이는 히로시마 ‘원폭 사몰자 위령비’ 아래엔 원폭 투하로 인해 숨진 이들의 명부가 보관돼 있다. 현재 보관돼 있는 명부(109권)에 적힌 희생자 수는 29만7684명이다. 지난 18일 1년에 한번씩 명부를 밖으로 빼내 바람을 통과시키는 행사가 열렸다.
르포 I 피폭 71년 히로시마를 가다
현지 ‘원폭 사죄 필요’ 의견 압도적
‘아베 지지율 반전’ 노린 일 정부와
‘사죄 요구’ 히로시마 간에 깊은 골
한국여론 “일본 책임론 희석화” 비판
오바마, 한국인 위령비 헌화 않으면
한-일간 역사갈등이 재발될 우려도
현지 ‘원폭 사죄 필요’ 의견 압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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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 요구’ 히로시마 간에 깊은 골
한국여론 “일본 책임론 희석화” 비판
오바마, 한국인 위령비 헌화 않으면
한-일간 역사갈등이 재발될 우려도
“쓸데없이 환상 가질 필요 없어. 모두 자기들의 정치적 판단이야!”
지난 18일 히로시마에서 재일동포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후쿠시마초의 한 선술집. 기자와 마주 앉은 김진호 히로시마현 조선인피폭자협의회 이사장은 ‘아사히 슈퍼드라이’를 컵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던 오후 6시였다.
김 이사장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모친의 뱃속에서 피폭을 당한 ‘피폭 1세’다. 폭심지에서 북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가베초에 살던 김 이사장의 부모는 원폭 투하가 이뤄진 뒤 폭심지 근처에 살던 두 딸을 찾기 위해 시내로 진입했다. 그로 인해 김 이사장의 부모,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두 살 위의 누이, 뱃속에 있던 김 이사장이 피폭을 당했다. 시내에 살던 두 손윗누이까지 합치면 4남5녀 9형제 가운데 4명이 피폭자인 셈이다.
평생 히로시마의 총련 조직에 몸 담았던 김 이사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7일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2009년 프라하 연설을 내놓은 뒤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비핵화와 관련해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바라보는 히로시마의 시선은 복잡하기만 했다. 히로시마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사죄를 해야 한다’는 의견과 ‘피폭지를 방문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여론이 팽팽히 맞물려 있다. 그러나 ‘사죄가 필요 없다’는 의견도 현실적인 타협론일 뿐, 내심으론 사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1991년부터 8년 동안 히로시마 시장을 지낸 히라오카 다카시(89)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입장도 있으니 사죄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명예만을 위해 오는 것이라면 히로시마에 좀 무례가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미-일 동맹 강화와 아베 총리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이번 방문을 활용하려는 ‘도쿄의 시선’과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를 원하는 ‘히로시마의 시선’ 사이엔 적잖은 골이 패 있는 셈이다.
그러나 ‘피폭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히로시마의 시선에서도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는 찾기 힘들었다.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피폭자들과 면담해야 한다”는 요청을 한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은 한국인·조선인 피폭자와 관련해선 오바마 대통령이 “외국인의 피해에 대해도” 언급하길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뿐이다. <주고쿠신문> 등 히로시마 주요 언론도 한국인·조선인 피해자의 인터뷰를 싣고는 있지만, 전체 여론을 주도하고 있진 못하다.
원폭 피해에 대한 히로시마의 공식 기억에서도 히로시마의 ‘가해의 책임’에 대한 성찰의 흔적을 찾긴 힘들었다. <한겨레> 취재진은 18~19일 이틀 동안 오바마 대통령이 둘러보게 될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의 전시물을 꼼꼼히 둘러봤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침략 △조선·대만에 대한 식민지배 △7만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조선인 피폭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안내판을 찾을 순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기념관과 별도로 만들어진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몰자 추도평화기념관’에서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히로시마엔 35만명 전후의 사람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런 사람들 안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 출신자가 다수 있었다”는 한 문장을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기념관 밖의 기념공원엔 1999년 5월 공원 밖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설치돼 있다. 이따금 일본 초등학생들이 찾아와 “히로시마엔 한국인 피해자도 있었다”는 교사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히로시마는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이 ‘일본의 가해 책임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한국 내 여론을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카타니 에쓰코(66) 히로시마현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2세부회 사무국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위령비에 헌화하면 왜 일본의 가해 책임이 옅어진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정말 비핵화를 원한다면) 한국에서도 히로시마의 운동을 지원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함께 이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 결국 한국과 중국은 (피폭자를 지원하는 사람 외엔) 핵무기를 긍정하고 있다”고 따져 물었다.
이 같은 미묘한 대립의 틈을 타고 또다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이 재발될 우려마저 제기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가 절실히 바라고 있는 피폭자 면담 없이 한국인 위령비에만 발길을 옮긴다면 “히로시마를 모욕했다”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기념공원 자리에 자신의 집이 있었다는 피폭자 아마자키 간지(88)는 “오바마 대통령과 직접 만나 꼭 얘길 하고 싶다. 원폭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위령비에 헌화하지 않으면 이번 방문을 바라보는 한국의 여론은 싸늘하게 식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헌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원폭 사몰자 위령비’와 한국인 위령비 사이의 거리는 성인 걸음으로 불과 270발짝에 불과했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취재 경험이 있는 도멘 마사카즈 <주코쿠신문> 기자는 “이번 방문이 퇴임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갖다 바치는 정치 행사로 끝나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 피폭자들의 의견을 함께 들으면서 비핵화를 위한 논의를 확장해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히로시마/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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