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 원폭 전 히로시마는
전쟁 막판엔 군수공장 잇단 건설
조선인들 강제동원…5만명 피폭
전쟁 막판엔 군수공장 잇단 건설
조선인들 강제동원…5만명 피폭
“아이고, 반갑습니다.”
18일 자이니치(재일동포)를 포함한 인근 지역 노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시설 ‘아리랑의 집’에서 만난 이실근(86) ‘히로시마현조선인피폭자협의회’ 전 회장은 기자의 손을 잡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오랜 시간 외면해 온 ‘히로시마의 가해 책임’을 평생에 걸쳐 추궁해 온 투사의 불같은 연설을 들을 순 없었다. 주변인들은 “최근 몇년 새 기억력이 떨어져 정상적인 인터뷰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1929년 6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이실근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이튿날 귀가 도중 시내로 진입해 ‘입시(入市) 피폭’을 당한 피폭 1세대다. 그가 평생 강조한 것은 현재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이전’의 역사들이다.
히로시마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의 부국강병 정책에 의해 근대적인 군사도시로 성장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1886년 1월 군제개혁으로 탄생한 히로시마 주둔 ‘제5사단’이다. 도시는 이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함께 이를 떠받치는 주요 병참 거점으로 크게 성장했다. 병사들을 해외의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 산요철도(고베~히로시마~시모노세키를 잇는 노선)와 우지나항(현 히로시마항) 등이 정비됐고, 동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구레시엔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육군의 히로시마와 해군의 구레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육·해군을 떠받치는 큰 기둥이 된다.
히로시마와 한반도의 불행의 역사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거슬러 오른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은 곧바로 히로시마 주둔 제5사단의 투입을 결정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5사단은 이듬해 10월 명성왕후 시해 사건에도 개입한다. 이후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와 제5사단 군법회의는 을미사변 관련자 모두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했다. 이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히로시마를 통해 조선, 중국, 시베리아, 동남아시아 등으로 나아가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한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히로시마는 군수 도시로 큰 번영을 누렸다. 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1938년 도요코교(동양공업)주식회사,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히로시마기계제작소 등 군수 공장들이 잇따라 건설됐다.
이런 공장을 만들고 가동하기 위해 조선에서 값싼 노동력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동원돼 히로시마로 몰려들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1930년 겨우 7189명이었던 히로시마의 조선인 인구는 1945년 8만4886명, 나가사키는 4944명에서 6만1773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히로시마의 조선인 인구가 이전보다 무려 11.8배, 나가사키는 12.5배나 폭증한 것이다. 결국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무려 5만명의 조선인이 피폭되고, 이 가운데 3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일본인 피폭자 42만명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해 무기(총기류)를 만들었던 동양기계주식회사는 마쓰다자동차로 사명을 바꿔 히로시마 경제를 지탱하는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894년 9월 히로시마 성엔 일왕의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육해군합동전쟁기관인 ‘대본영’이 설치됐다. 메이지 일왕이 이곳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무렵 성 안엔 제5사단과 주고쿠군관구의 사령부 등이 자리해 있었다.
지난 18일 방문한 히로시마 성터에선 이곳에서 숨진 일본 군인들을 위한 위령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5사단은) 일청전쟁, 일러전쟁, 북청사변, 시베리아 출병 등 다수의 전쟁에서 늘 우리 군의 일익을 담당해 활약했다.” 비문에서 일본이 아시아 주변국들에게 행한 식민지배와 침략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읽을 수 없었다.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엔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이것은 참으로 ‘야스쿠니적’인 역사 인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히로시마/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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