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원폭 생존자인 모리 시게아키를 포옹하고 있다. 히로시마/AP 연합뉴스
“71년 전 밝고 구름이 없는 날 아침, 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이 변했습니다. 섬광과 화염이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이는 인류가 자신을 파괴하는 수단을 손에 넣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7일 오후 5시40분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념공원의 ‘원폭 사몰자 위령비’ 앞에서 “우리는 왜 히로시마에 온 것일까요”라고 자문하면서 원폭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담긴 18분에 걸친 연설을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관심을 모았던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원폭 투하로) 수십만명의 일본인과 여성, 아이들, 그리고 수천명의 한국인, 수십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라는 말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한국인 피해자들도 있었음을 명확히 밝혔다. 이에 견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71년 전에 단 한 발의 원자폭탄에 의해 어떤 잘못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아이들이 무참히 희생됐다”고 말했을 뿐 한국인 피폭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악을 행하는 인간의 능력을 없앨 수 없기에 우리의 동맹을,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처럼 핵을 가진 나라는 이런 두려움의 논리에서 벗어나 핵 없는 세계를 추구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자신의 비전을 다시 한번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살아생전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은 재앙이 닥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핵)무기의 재고를 없앨 계획을 세울 수 있고, 핵 확산을 막고 광신도로부터 죽음의 물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오후 5시25분께 평화공원에 도착해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을 거쳐 아베 총리와 함께 위령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바마 대통령은 위령비에 헌화한 뒤 잠시 눈을 감으며 애도의 뜻을 표하긴 했지만 허리는 굽히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헌화를 한 뒤 허리를 굽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히로시마 방문은 향후 동아시아 정세에 깊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2014~15년 이뤄진 일본의 안보법제 정비로 ‘글로벌 동맹’으로 역할과 활동 범위가 확대된 미-일 동맹이 과거의 비극을 털어내고, ‘화해의 동맹’으로 거듭날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까지 히로시마 방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생명을 기억하고 △핵 없는 세계를 위한 비전을 재확인하며 △탁월한 미-일 동맹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선 오바마 대통령 방일의 하이라이트는 히로시마가 아니라, 그 직전에 이뤄진 미 해병대 이와쿠니기지 방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 해병대원들과 자위대원들 앞에서 “옛날에 적이었던 두 나라가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라 ‘화해의 동맹’이 됐다”고 강조했다.
위령비 앞에서 연설을 마친 오바마 대통령은 쓰보이 스나오(91)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 대표위원 등 피폭자 2명과 손을 맞잡고 짧은 환담을 나눴다. 이후 미·일 정상은 위령비를 가로질러 북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같은 방향에 자리한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를 들르진 않았다. 양국 정상은 저 멀리 원폭 돔이 보이는 지점에 멈춰 섰고, 오후 6시15분께 오바마 대통령을 태운 전용차가 모토야스교를 지나 공원을 떠났다.
원폭 사몰자 위령비에서 걸어서 2~3분이면 닿을 한국인 위령비 방문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향후 한-미 관계에도 미묘한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동선과 시간 제약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미-일 동맹이 ‘화해의 동맹’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미-일 3각 군사협력에 대한 미국의 요구도 거세질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7일치 <아사히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다.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계획은 이 지역, 미국, 그리고 세계에 대한 위협”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아베 총리와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한·미·일 3개국 협력을 증강해 억지력과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고 밝혔다.
히로시마/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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