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도지사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 후보가 지난달 30일 도쿄에서 유세를 하며 불끈 쥔 주먹을 들어올리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선거전이었습니다.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 지지자들이 확산되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녹색으로 된 뭔가를 입고 나와달라고 하니 티셔츠, 스카프, 타월 등을 입고 들고 나와주셨습니다. 집에 녹색 물건이 없다며 브로콜리를 들고 나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지난 31일 도쿄 역사상 첫 여성 도지사로 당선이 확실하다는 결과를 받아든 고이케 유리코(64) 후보는 감격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당선 소감을 밝히는 도쿄 도시마구의 선거 사무실엔 선거 기간 동안 고이케의 상징이었던 녹색이 다시 한번 넘실거렸다. 그는 “이제껏 없던 도정, 본 적이 없는 도정을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가겠다”고 말했다.
7월31일 치러진 도쿄 도지사 선거는 일본 선거사에 오랫동안 회자될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어떤 정당의 지지도 얻지 못한 여성 후보가 무려 291만2628표(44.5%)를 획득해 자민당·공명당 등 연립여당의 조직표를 등에 업은 마스다 히로야 후보(179만3453표)를 100만표가 훨씬 넘는 차이로 꺾는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투표율도 59.7%를 기록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가 ‘탈핵’을 전면에 내건 2014년 2월 선거(46.1%)보다 무려 13.6%포인트나 급등했다. 일본의 민심이 고이케를 향해 성큼 움직인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고이케의 승리 원인을 그의 ‘정치적 스승’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전매특허였던 ‘극장 전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장 전술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선악을 가르고 국민들에 직접 선택을 호소하는 수법을 뜻한다. 고이케는 후보 출마 때부터 도민들이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는 도의회와 정면 대결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선거 기간에 그가 가장 강력히 물고 늘어진 이슈는 2020년 도쿄 올림픽 관련 예산이었다. 처음엔 7300억엔 정도라고 했던 올림픽 유치 경비가 지금은 2조~3조엔 정도로 폭증해 있는 상태다.
고이케 후보는 이런 도의회의 ‘블랙박스’ 행정을 공격하며 자신이 당선되면 “도 행정을 투명화하겠다” “도의회를 해산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이 과정을 통해 거대한 조직과 대결하는 당당한 여성 후보(“나는 나뭇잎배, 저쪽은 군함”)라는 강력한 이미지가 형성됐다.
고이케의 이런 전술은 큰 효과를 거뒀다. <아사히신문>의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무당파층의 51%, 자민당 지지자 49%, 제1야당인 민진당 지지자 28%가 고이케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난다. <도쿄신문>도 “여성 도지사라는 참신함에 더해, 도의회의 중진들이 도정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는 구폐를 타파했으면 좋겠다는 공감이 시민들 사이에 넓게 퍼졌다. 이는 예전에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고 말해 인기를 모았던 고이즈미 총리를 방불하게 하는 선거 전술”이라고 짚었다.
이번 선거는 다른 한편으론 야권 연대를 주도해온 민진당 지도부의 교체와 ‘아베 1강 체제’의 균열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 모양새다. 이날 패배를 예감한 듯 오카다 가쓰야 민진당 대표는 지난 30일 차기 대표 선거에 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베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표가 야권 단일후보인 도리고에 혣타로(76)가 아닌 고이케에게 몰렸기 때문이다. 자민당의 한 중진의원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당은 조직이 굳어지면 (마스다 후보가) 고이케를 꺾을 수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도쿄는 전국의 선행지표다. 보수층 안에서 아베 정권과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언제든 그쪽으로 민심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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