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일본 미에현 이세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세/AP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8일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밝힌 12·28 합의 관련 언급은 차기 한국 정부에게 ‘합의를 이행할 것인지, 일본과 전면적인 외교적 대결을 벌일 것인지’ 사실상 ‘양자 택일’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는 이날 “재작년 말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불가결한 합의라고 서로 확인했다. 일본은 성실히 우리 의무를 실행해 10억엔의 거출(출연)을 이미 시행했다. 다음은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베 총리는 “설령,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이를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의 신용 문제”라며 합의 당사자인 박근혜 정권을 넘어 한국의 차기 정부까지 겨냥했다.
아베 총리가 12·28 합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추가 조처를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을 뿐 아니라, 차기 정부에까지 외교적 부담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차기 한국 정부는 12·28 합의를 파기한 뒤 일본과 전면적인 ‘외교 전쟁’을 벌이거나, 일본 요구에 굴복해 평화비(소녀상)를 철거하는 극단적 방안 외에 절충적인 선택지를 찾기가 힘들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합의 직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소녀상이 철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10억엔을 출연하는 게 옳으냐는 내부 논의 과정에서 돈을 입금하면 한국에 대해 “‘도덕적 우위’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논리를 동원해 이를 추진한 바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치명적인 판단 미스로 인해 위안부 문제라는 씻을 수 없는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운운하며, 합의 이행을 강요하는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차기 정부가 전면 대결을 택해도 한국의 승산이 높지 않은 구도다.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기 위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미일동맹을 강화한 미국의 시선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협상력을 높이려면 역사 문제에 대해선 한-중이 보조를 맞춰 일본을 압박해야 하지만, 이는 새로 등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윤병세의 섣부른 위안부 외교가 자신들만 아니라 차기 정부까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위기로 몰아 넣은 셈이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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