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국회의사당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한국 ‘보수의 축’ 소멸!”(<요미우리신문>) “한국 보수의 유력후보 부재 상태로!”(<니혼게이자이신문>)
1일 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의 갑작스런 대선 불출마 선언은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의 5대 전국지는 일제히 반 전 총장의 출마 포기 소식을 1면 주요 뉴스 등으로 다뤘다.
그런데 논조는? 낙담 그 자체였다.
일본 보수의 정서를 대변하는 <요미우리신문>는 1면에서 “반씨는 보수계의 유력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1월 귀국한 뒤에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다. 보수계 유일의 유력 후보였던 반씨가 불출마를 결정한 것으로 인해 대통령 선거의 구도가 크게 변했다”고 했다.
신문은 왜 반 전 총장의 낙마를 안타까워할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 간 12·28 합의 때문이다. 신문이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낸 것은 1면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은 8면 해설 기사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이 기사에서 “반 전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 시절 위안부 문제의 일-한 합의를 평가했지만 (이것이) 좌파계 미디어들로부터 공격 받는 원인이 됐다”며 “(12.28 합의를) 부정하는 등 반일적 자세가 눈에 띄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에게 (선거 구도가) 유리해 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사히신문>도 반 전 총장은 “위안부 문제의 일-한 합의에 대해 평가한 발언으로 비판에 노출돼 왔다”는 평가를 남겼다.
일본 언론들은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땐 한-일 간 주요 현안에 대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기사를 적잖이 내보내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 한국 사회를 뒤흔든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리자 이 같은 위기 상황을 수습하고 한-일 관계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보수 진영의 대안으로 반 전 총장을 주목해 왔다.
일본의 보수는 한-일 관계가 악화된 원인을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반성적인 자세를 갖지 않은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가 아닌 노무현 정권 시절 이후 본격화된 한국 ‘386세대’의 반일정서에서 찾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동료였던 문 전 대표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면 12.28 합의가 파기되고 한-일 관계가 악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은 “반씨가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인해 (한국)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를 주도한 좌파계 최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에게 한층 더 유리해졌다. 반씨 외에 유력 후보가 없는 보수계에선 여당 새누리당을 집단 탈당한 의원들이 발족시킨 제3야당인 바른정당의 남경필 경기도 지사와 박씨에게 반기를 든 비박파의 중심인물 유승민 의원이 출마를 표명하고 있다”고 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