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의 아스파라거스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스기하라 요시유키(56·왼쪽), 게이코(54) 부부. 부부는 6년 전 터진 3·11 참사를 뛰어넘기 위해 아스파라거스 재배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판로’다.
“저는 (후쿠시마현) 후타마바치 출신이예요.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던 그곳.”
지난 6일 후쿠시마현 북쪽에 있는 후쿠시마시의 한 농업용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스기하라 게이코(54)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3·11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참사가 일어난 지 올해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전 참사로 고향을 잃은 부부는 오랜 피난생활 끝에 2015년 버려진 농경지를 개간해 아스파라거스 농사를 시작했다. 부부는 올해 1월 처음으로 자신들이 직접 기른 아스파라거스를 출하할 수 있었다. 충격을 딛고 재기 발판을 마련했지만, 원전 참사의 상처는 여전해 보였다.
스기하라 부부 ‘고난의 타향살이’
원전 20㎞ 바깥 고향 땅도
방사능 뒤덮어 불모지로
“원전 ‘복덩이’로 알았는데 배신감”
피난지 버려진 땅 비닐집 짓고
아스파라거스 재배로 ‘재기 꿈’
고향 그립지만 아직도 통제구역
3·11 참사 상처는 현재진행형
“남편 고향은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고, 나는 후타바마치에요. 어릴 때부터 원전 옆에서 자랐죠. 어릴 땐 아버지가 농사 일이 없는 겨울이면 외지로 나가 일을 했죠. 그러나 (1970년대 초) 도쿄전력 원전(후쿠시마 제1원전)이 생긴 뒤에는 아버지가 (원전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겨울에도) 늘 집에 있을 수 있었죠. 그게 원전에 대한 제 기억이이예요.”
게이코와 같은 후쿠시마 ‘하마도리’(원전이 밀집한 바다 쪽 지역) 사람들에게 원전은 고마운 존재였다. 일본에서도 궁벽한 지역으로 꼽히는 후쿠시마 해안지대에 들어선 원전은 지역 주민들에게 안정적 일자리와 적잖은 보조금을 가져 온 ‘복덩이’였다. 게이코의 아버지와 오빠는 물론 주변 오쿠마마치·나미에마치 등에 살던 친척들 대부분이 원전 관련 일로 먹고 살았다. 그는 “원전에서 사고가 난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몇십년을 살았다. 그래서 (3·11 참사가 터졌을 때)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오빠는 지금도 사고를 일으킨 제1원전에서 진행 중인 폐로 작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스파라거스는 재배 기간이 길고, 온도 관리가 어려워 기르기 어려운 작물로 꼽힌다. 요시유키는 “겨울에 시장에 나오는 아스파라거스는 대부분 외국산인데, 일본산을 공급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6년 전 ‘그날’ 게이코는 남편 요시유키(56)와 남편 고향인 이타테무라 나가도로 지구에 살고 있었다. 부부는 회사원이던 남편이 정년퇴직을 한 뒤에는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재배작물로 그때부터 아스파라거스를 택했다. 작물 선정을 끝낸 게이코는 2009년께부터 이웃들을 모아 작물 재배에 나섰다. 상품으로 내보낼 만큼 줄기가 굵은 아스파라거스를 수확하기 위해선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오랜 공을 들여 첫 작물을 출하할 시기가 왔을 때 3·11 참사가 터졌다.
게이코가 살던 이타테무라는 원전 사고가 나면 피난 지시가 내려지는 20㎞권 밖에 있었다. 방사능 물질이 멀리 떨어진 이타테무라까지 날아오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3·11 참사 이후 후쿠시마 1·2·4호기 원자로에서 수소 폭발이 발생한 뒤 게이코는 시댁과 친정 부모를 모시고 딸이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이즈와카마쓰 쪽으로 일시 피난을 떠났다. 딸 혼자 살던 원룸에 7명이 살았다. 부부는 결국 3월 말 다시 이타테무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당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폭발로 원자로가 손상된 뒤 불어닥친 바람의 영향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사능 물질은 이타테무라 전역에 내려앉은 뒤였다. 게이코는 “방사능은 눈에 안 보이니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얼마 후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고 말했다. 사실을 깨달은 건 그 무렵이었다. 이타테무라에 피난지시가 내려진 건 4월22일이었지만 피난 갈 장소가 없어 부부는 6월 말까지 방사능으로 오염된 자택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현은 후쿠시마현산 농수산물의 안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시장의 불신은 여전하다. 후쿠시마현 농업종합센터에서 방사능 모니터링 검사를 진행하는 모습. 센터 관계자는 이젠 기준치를 넘는 샘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피난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부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론은 ‘다시 아스파라거스’였다. 요시유키는 “일본에서 겨울에 팔리는 아스파라거스는 대부분 멕시코 등 외국산이다. 일본산 아스파라거스를 겨울에도 공급할 수 있도록 다시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현재 경작지를 찾아냈다. 풀이 무성했던 ‘경작 포기지’를 개간해 비닐하우스 4동을 세웠다.
부부는 올 1~2월 재배한 아스파라거스를 매일 5㎏씩 출하했다. 3~4월엔 하우스 앞 노지에서 재배한 작물 수확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역시 ‘판로’다.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현은 “현내 농수산물은 철저한 방사능 검사를 해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기피하는 현상은 여전하다. 부부는 “여전히 적자다. 투자금이 많은데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마음은 복잡하다. 게이코는 “살던 집은 지진으로 지붕이 무너진데다 비가 새 도무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리운 듯 긴 회상이 이어졌다. “이타테무라는 좋은 곳이었어요. 산에 올라가 한 시간이면 장을 본 듯 바구니 한 가득 산나물을 캘 수 있는 곳이었죠. 여름에도 시원해 선풍기가 필요 없었어요.” 목소리에 습기가 서려 있었다.
이타테무라의 다른 지역은 3월31일 피난지시구역에서 해제될 곳이지만, 부부가 살던 나가도로 지구는 오염이 심해 여전히 돌아갈 수 없다. 3·11 참사로 한때 피난지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현재는 해제지역이 된 곳에 사는 이들은 모두 5만2370명이다. 하지만 귀환을 실행한 이들은 7.9%인 4139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대부분 방사능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고 자란 고향에서 살다 죽고 싶다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6년이 흘렀지만, 3·11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후쿠시마/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