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016년 8월19일 오후 서울 중구 청구동의 자택을 찾은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과 환담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갑작스런 부고에 일본에서도 애도의 반응이 이어졌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에선 24일 그의 부고를 1면을 통해 다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직접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김 전 총리의 부고가 전해진 직후인 23일 “갑작스런 부고를 접하게 돼 견디기 힘든 깊은 슬픔을 느낀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일-한 국교 정상화에 직접 참여해 오늘의 일한관계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다. 또 그 뒤에도 일한관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다. 심심한 슬픔을 전하는 것과 함께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도 “한국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중책을 담당했고, 일한 양국의 우호와 발전을 위해 큰 노력을 했다. 국가의 중심에서 대외 교섭 등에 관여했기 때문에 경험과 깊은 견식을 가진 분이었다. 오랜 친구를 잃게 돼 참으로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1962년 2월21일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을 만나 회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 언론들은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와 한국 경제발전을 이끈 ‘희대의 참모’이자, 한일 관계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이를 해결했던 대표적인 지일파라 평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당시 36살의 젊은이”였던 김 전 총리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라는 일본의 대일 청구권 자금의 액수를 정한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통해 한-일 국교정상화의 주춧돌을 놓았다면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제철소(포스코)와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세계 유수의 정보기술(IT) 국가의 기초를 놓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도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 전 총리가 (그해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일본에 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와 회담했다. 당시 외무성 담당과장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 (일본 정치인들과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한) 김종필씨가 일본에 와 머리를 숙이게 되면 일본은 무슨 말도 못하게 된다(더 이상 한국을 추궁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일본 언론들은 또 1997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졌을 당시 김 전 총리와 또 다른 지일파 정치인이었던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등이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를 설득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려 했지만, 독도 문제 등으로 일본을 비난해 온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자민당 내 반감이 강해 실패했던 사연도 소개했다.
김 전 총리의 생애를 두고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 쪽 평가는 반일감정을 꺾고 한-일 국교정상화라는 전략적인 선택을 통해 한국 경제발전의 주춧돌을 놓은 ‘유연한 정치가’였다는 긍정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는 살아생전 <엔이이치케이>(NHK) 방송과 인터뷰에서 “일본은 대국인만큼 역사 문제에 대해선 한국에 반성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그러나 미-소 냉전 체제 아래서 ‘형’인 일본이 냉전의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동생’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김 전 총리의 전통적인 한-일관은 시대 변화와 함께 ‘극복해야 할 적폐’라는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1926년생으로 일본어에 능했던 김종필 전 총리는 나카소네 전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등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계 거물들과 친교를 맺어왔다고 일본 언론들이 전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복잡다단했던 전후 한-일 관계사 속에서도 “한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니혼게이자이신문>)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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