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미쓰비시광업이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일명 군함도)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9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은 일본 미쓰비시는 ‘전범 기업’의 상징이지만 일본 정부 태도에 발맞춰 계속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한국 법원에서 판결이 나왔거나 재판이 진행 중인 강제동원 소송 15건 중 7건은 미쓰비시중공업이 상대다. 미쓰비시 상대 재판이 많은 이유는 대표적 군수기업으로 조선인 강제동원에도 앞장섰기 때문이다. 일본이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뒤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7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본 역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는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 공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을 약 10만명으로 추정한다.
여기에는 침략전쟁과 함께 대표적 재벌로 성장한 기업사가 있다. 미쓰비시는 이와사키 야타로가 1870년 만든 해운회사가 뿌리다. 1873년부터 미쓰비시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듬해 대만 침공, 1875년 강화도 사건 때 일본군 병력 수송을 일부 맡았다. 1880년대에는 일본 정부가 운영하던 나가사키조선소를 매수하고 규슈에서 탄광 운영을 시작했다. 정계 및 군 수뇌부와의 관계를 이용해 사세를 확장하면서 미쓰이·스미토모와 함께 3대 재벌로 성장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태평양전쟁의 주력 전투기 ‘제로센’을 만들고, 배수량 6만5000t의 거대 전함 ‘무사시’도 건조했다.
지난 2일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회원들이 일본 도쿄 미나토구 미쓰비시중공업 사옥 앞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쓰비시 재벌의 성장 뒤에는 조선인 피해자들의 눈물이 있다. ‘군함도’로도 알려진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을 미쓰비시가 운영했다. 이곳에서 조선인 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 대법원 배상 판결이 나온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공장에 강제동원된 이들은 원자폭탄 피폭 피해까지 입었다. 피폭 당시에 조선인 10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대법원이 배상 판결을 한 2건 중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한 원고들은 동원 당시 14~15살의 소녀였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관련 소송은 모두 3건인데, 원고 11명 중 8명이 생존해 있다. 유족이 대신 소송을 진행하는 3명은 1944년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 숨졌다. 신일철주금 사건의 원고 4명 중 3명이 별세하고 지금은 94살 피해자만 남은 것과 대조적이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동원 당시에 그만큼 어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2008년에 낸 자료를 보면, 조선인 남성 징용자들이 소녀들을 보고 “아기들”이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뒤 침략전쟁 배후에 있는 재벌 해체에 나섰다. 미쓰비시중공업은 3개로, 미쓰비시상사는 100여개로 쪼개졌다. 그러나 미쓰비시 계열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이후 단계적으로 재결합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군수산업의 핵심으로 재부상했다. 미쓰비시그룹은 현재 회원사 626개에 직원이 약 57만명에 달한다.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은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는 사죄하고 재단을 만들어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사죄와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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