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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위험의 외주화 되레 부추기는 정부

등록 2021-08-11 18:01수정 2021-08-12 02:36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도 위기 연쇄기고 _1

[왜냐면]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군은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태안화력에서 컨베이어에 끼어 사망한 김용균씨도, 평택항에서 개방형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이선호씨도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원청은 이 죽음에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 위험의 외주화는 이처럼 하청노동자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구의역 김군은 열차 운행 시간에 작업을 하면서도 관제소에 직접 연락을 할 권한이 없어서 열차를 멈추지 못했다. 김용균의 동료들은 현장의 위험을 개선할 방안을 제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힘을 갖지 못했다. 외주화는 원청과 하청의 의사소통을 단절시키고 현장 작업자의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위험을 증폭시킨다.

그런데 위험의 외주화는 하청노동자만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다중이용시설이나 공중교통수단에서 업무의 외주화는 시민들이 더 위험하도록 만든다. 메르스가 확산되던 때 삼성서울병원의 환자이송 노동자는 감염 증세가 있었지만 9일이나 방치되었다. 용역 노동자는 병원의 방역 관리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가 되었다. 케이티엑스(KTX) 승무원은 안전업무를 담당해야 하지만, 코레일은 이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지 않으려고, 승무원은 안내업무만 한다고 주장하며 위험에 대비한 훈련과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승객들은 위험 상황에서 도움을 받기 어려워졌다.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하청에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면, 원청 책임자가 처벌을 받는다면, 원청은 위험을 외주화할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예방조치에 힘을 쏟게 될 것이다. 노동자와 시민의 죽음을 막으려면 원청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은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 등을 할 경우’ 경영책임자의 의무를 원청에 동일하게 부여했다. 이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의 소중한 성과이다. 국회는 ‘경영책임자의 의무’를 시행령에 담도록 해놓았다. 따라서 시행령에 담긴 경영책임자의 의무는 위험을 외주화한 모든 경영책임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은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를 훼손하고 있다. 시행령 제4조와 제12조에 경영책임자의 의무를 적시하면서 별도 항목인 8호에서 ‘도급 시 원청 경영책임자의 의무’를 별도 항목으로 담고 있다. 도급을 주었을 경우 원청사용자는 그 조항만 지키면 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8호의 내용도 매우 협소하여, ‘안전관리 능력이 있는 업체’에 도급을 맡기고, 그 업체에 원청이 적정한 비용과 적정한 기간을 보장하면 된다고 해놓고 있다. 그리고 시민재해의 경우 원청이 하청업체에 ‘안전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도록 해서, 하청업체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조항도 넣어놓았다.

도급업체가 안전관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도급업체에 적정한 기간과 비용을 보장하더라도 위험의 외주화는 위험을 증폭시킨다. 위험의 외주화는 원청-하청 간 의사소통을 단절시켜 위험 상황에 대한 대처를 어렵게 만들고, 안전관리의 사각지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험의 외주화 자체가 중단되어야 하고 원청이 포괄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대재해처벌법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다. 그런데 정부는 시행령 제4조8호, 제12조8호를 통해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을 할 경우’ 원청의 의무와 책임을 줄여놓고, 원청이 위험의 외주화로 책임을 피해가도록 사실상 부추기고 있다.

이윤을 위해 생명을 무시하는 기업들에 경각심을 주고 제대로 예방조치를 하게 하려면 권한이 있는 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위험의 외주화를 부추기는 시행령 제4조8호와 제12조8호를 삭제하라. 만약 정부가 이 조항을 넣은 취지가 원청의 책임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자 한다면,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을 한 경우’에도 원청 경영책임자의 모든 의무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시행령에 명시하라.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 때 시민들이 적극 참여해주신 것처럼, 시행령 제정 과정에도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더해서, 법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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