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권오훈 | 서울교통공사 노동자(인권경영위원)
서울교통공사 시위 대응 보고서 때문에 상처를 받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보고서 내용에 유엔(UN) 장애인권리협약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서울시의회 조례와 서울시에서 발표한 혐오표현 가이드라인에서 금지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시키고 대립을 확산시킬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당연히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동권을 보장할 책무가 있는 대중교통 운영기관에서 발생한 사건이기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지하철 노동자 전체를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애인을 적으로 보는 지하철을 민영화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온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대다수의 선량한 역 직원들은 장애인과 장애인 단체를 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역 직원들도 장애인 단체와 마찬가지로 교통약자 이동 편의시설 설치를 강력하게 원합니다. 교통안전공단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34%가 교통약자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보편적 이동권 보장이라는 세계적 추세에 따라 교통약자법을 2006년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법에 처벌 조항이 없다 보니 지하철 운영기관 입장에서는 이동권 보장을 위한 예산 확보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대신 이동 편의시설 부족을 역 직원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겨우 버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에서는 역 직원들이 위험과 부상을 감수하면서 리프트로 이동을 돕고 있습니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길게 보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파트너입니다. 장애인단체의 요구처럼 이동 편의시설의 조속한 설치는 역 직원들의 안전하게 일할 권리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역 직원들은 장애인 이동 편의시설 설치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애인단체들의 투쟁으로 생긴 이동 편의시설은 사실 비장애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교통약자 중 노인이 약 49%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장애인의 이용 비율은 9.2%에 불과합니다. 노인, 임산부, 공부에 지친 중·고생,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노동자, 가끔 야간과 격무에 시달리는 샐러리맨까지 장애인 시위로 설치된 역사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역 직원들 입장에서 보편적 이동권 보장 문제는 서울교통공사가 지하철 공기업으로서 존재해야 할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에 보편적 이동권의 파트너가 분명합니다.
문제는 정부에 있습니다. 지하철을 시민의 이동권 보장이라는 인권문제로 보지 않고, 자본의 논리 즉 적자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의 적자는 시민들의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의도된 적자, 즉 좋은 적자입니다. 정부가 예산 타령을 하지만 이는 거짓입니다. 정부는 교통시설 특별회계를 운영하고 있는데, 문제는 기금을 전국에 도로를 신설하는 선심성 예산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예산을 이동권 보장 예산에 투입하면 이러한 시위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서울교통공사 내부에도 있습니다. 주요 선진국처럼 공사의 인권경영위원회에 장애인단체 등 이해당사자를 위원으로 참여시켜 경영의 파트너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공공성 강화, 시민의 보편적 안전한 이동권 실현을 위한 파트너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거듭날 것을 기대하며, 적이 아닌 공공성의 공동 수호자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