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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일하다 죽지 않게’가 그리 어렵나

등록 2022-05-02 16:00수정 2022-05-03 02:41

중대재해법을 흔드는 보이는 손들
지난 3월30일 동국제강 포항1공장 앞에서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 관계자가 산재사망사고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월30일 동국제강 포항1공장 앞에서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 관계자가 산재사망사고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황철우 |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장

임신 4개월인 아내와 암 투병 중인 장모님이 한뎃잠을 자처하고 있다. 부모님도 눈물을 삼키며 그 곁을 지킨다.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고 이동우(38)님은 동국제강 비정규직 노동자다. 3월28일 동국제강 포항공장 천장크레인 보수 작업 중 크레인 위 회전체가 갑자기 움직이면서 안전끈이 몸에 감겨 숨졌다. 작업 중 전원은 차단되지 않았고 이를 감시하는 관리자도 배치되지 않았다.

유가족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원청인 동국제강의 책임 있는 답변과 해결책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국제강은 사과 한마디 없이 회사와 임직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보잘것없는 보상금만을 제시했다. 이에 분노한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연대모임은 지난달 19일 서울 중구 을지로 동국제강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세욱 대표이사의 공개 사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하며 분향소 설치와 함께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동국제강은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중대재해 정기 감독에서 23건의 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과태료 2800여만원을 부과받은 바 있다.

1월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고 붕괴와 폭발 사고, 추락, 끼임 사고로 인한 산재 사망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법 시행 뒤 두달 동안 적용 대상인 50인 이상 사업장에서만 36명이 사망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2년간 법 적용이 유예된 50인 미만 사업장과 법 적용에서 제외된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전체 사망사고의 75% 이상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산업안전은 비용과 책임의 문제다. 당연히 기업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법 시행을 앞두고 안전인력 확충과 안전설비 강화보다, 처벌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형 로펌과 계약 체결에 몰두했다. 위험의 외주화를 중단하고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비용보다 법의 사각지대를 찾는 게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김앤장은 120명이 넘는 고용노동부, 경찰, 검찰 출신으로 중대재해 대응그룹을 꾸렸고, 그 밖에 광장, 세종, 율촌, 화우, 지평 등 다른 대형 로펌들도 중대재해 전담팀을 만들어 기업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사주에게 등기이사에서 빠지도록 조언한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동국제강도 김앤장의 법률 자문을 받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일들을 막자며 만든 중대재해처벌법이 대형 로펌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춰 재계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신 규제’로 규정하고 법 개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도 법 개정을 약속하고 있으며, 법 개정이 어려우면 법의 실효성을 무력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산재로 숨지는 노동자는 2천명이 넘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기업의 이윤보다 노동자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사회적 공감대와 수많은 죽음으로 만들어진 법은 벌써 실효성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법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은 모든 사업장에 예외 없이 전면 적용돼야 한다. 중대재해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 적용의 예외를 만들어놓으면 산재 사망사고는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주에 대한 강력한 처벌, 위험의 외주화 중단, 안전인력 확보, 안전시설 투자 등이 법 조항에 추가돼야 한다.

‘일하다 죽지 않게’는 문재인 정권이 외쳤던 ‘사람이 먼저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말과 너무도 부합하는 것이며, 노동자 생존의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시급한 민생 현안이며 문재인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민주당이 나서서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눈치 때문에 개혁의 성과를 누더기로 만드는 경험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아픈 노동자와 손잡는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길이며 역사의 후퇴를 막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앞장섰던 산재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의 회원들은 오늘도 농성장을 지키며 유가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언제까지 안타까운 죽음과 유가족의 절규가 반복되어야 하는가? 어미는 자식의 죽음 앞에 목메어 울고, 아이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태어나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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