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
새 정부가 중대재해처벌법에 명시된 ‘경영책임자 의무’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서 산업안전보건 관계법령 개정 등을 통해 현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겠다고 했고, 새 총리도 중대재해처벌법을 기업에 대한 규제로 보고 ‘들여다봐야 할’ 대상으로 지목해서다.
이는 그간 경영계가 줄곧 요구해온 사항이기도 하다. 이 법이 경영책임자에게 부여하는 의무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서 무엇을 지켜야 할지 모르겠으니 지켜야 할 최소한을 구체적으로 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9월 한 경영자단체는 영국의 산업안전보건 정책 방향을 조사한 보고서를 토대로 이런 견해를 발표했다. ‘영국은 사업장의 위험요소에 대한 관리·통제 방식을 사업주 스스로 선택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안전보건 수준에 따른 유연한 안전관리가 가능하도록 기업 자율의 책임관리 방식으로 안전관리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산업안전보건 법령에 사업주가 준수해야 할 1222개 조문의 의무를 매우 상세히 규정하고 있으며 사업장 감독 때 기업이 선택한 안전관리 방법의 합리성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규정과 다를 경우 무조건 사업주를 처벌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 법령을 두고는 사업주의 자율 책임을 요구하면서, 중대재해처벌 법령은 경영책임자가 지켜야 할 사항을 구체적으로 정해달라니 어리둥절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전보건 관리 규제에 관한 특성은 변함이 없고,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정하는 것이어서 더 포괄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안전보건 관리는 작업 때 사용하는 시설과 장비, 유해·위험 물질, 생산
기술, 작업 방법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관리가 포함된다. 태생적으로 복잡해서 규정으로 다 정하기 어렵고, 과한 구체화는 오히려 사각지대를 낳는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만 해도 660개가 넘는 조항이 있지만 실제 형사처벌 단계에 들어가서는 적용 조항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첨단기술 시대에는 일일이 규정으로 정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빠르게 변하고 그에 따라 시설 및 장비와 작업 방법이 달라진다. 규정이 따라가기 너무 벅차다. 기술과 규제 간의 격차로 인한 규제의 현장 적용성이 큰 문제로 대두한다.
빠르게 변하는 근로 형태 또한 안전보건 관리 의무를 사전적으로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게 한다. 최근 크게 늘어난 플랫폼 노동, 긱 노동 등에 종사하는 사람의 고용주가 누구인지 특정하기 어렵고 작업에 사용하는 시설, 장비를 누가 관리해야 하는지를 정하기도 어렵다.
복잡한 생산기술과 방식, 다양한 형태의 노동, 현장의 불확실성과 역동성은 작업 중 유해·위험 요인을 외부에서 파악하기도, 감독하기도 힘들게 한다. 영국 등 유럽에서 목표를 정해주고 구체적인 조치 방법은 사업주 자율에 맡기는 목표기반 규제로 바꾸는 이유이다. 해당 사업장의 유해·위험 요인을 가장 잘 아는 사업주가 사업장의 특성과 자신의 역량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통제 조치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정부는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감독하는 방식이다.
영국 산업안전보건청 이사회의 전 의장 주디스 해킷은 “영국의 사고와 질병을 통합한 산재 발생률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것은 ‘위험을 생산하는 자가 그 위험을 통제하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는 단순하고 변함없는 원칙을 적용하는 데 힘입었다”고 평가하며 “다른 많은 나라가 영국 모델을 자신들 관리체계의 토대로 삼아가고 있다”고 밝힌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율책임은 사업주가 위험을 관리하는 역량을 키우고 해당 사업장의 위험을 통제하는 ‘적합한’ 방법을 고민하도록 한다. 이러한 고민이 부담스럽다고 의무를 구체화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안전 확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해진 최소한만 지키겠다는 속셈을 내비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체계 구축과 관리상 의무를 외부에서는 일일이 정하기도 어렵고, 정해준다 해도 사업장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기준에 대한 수용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길 때다. 법이 정하는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밖에서 정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사업장의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하고 적절한 통제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지 안에서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