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6일 파키스탄 자파라바드에 폭우가 내린 후 사람들이 홍수 지역을 가로질러 아이들을 옮기고 있다. 피다 후사인(Fida Hussain)/AFP 게티이미지
[왜냐면] 이송희일 | 영화감독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파키스탄 여성들의 성매매 소식에 숨이 턱 막힌다.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그 물이 빠지는 데 수개월이 걸린다. 사망자 1500명 이상, 이재민 3300만명, 경제적 손실 350억달러, 농작물 3분의 1 피해….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 대학살’이라고 규정했다.
‘북반구’ 선진국들을 향한 파키스탄의 성토가 뜨겁다. 탄소배출에서 자신의 책임은 고작 0.5% 남짓인데, 기후재난에 먼저 휩쓸리니 북반구 국가들의 책임을 묻는다. 이른바 ‘기후채무’다. 여기에 플랜테이션과 대운하 건설 등 영국 식민지배 시절에서 비롯된, 엉망인 관개배수 시스템이 사달을 냈다는 ‘식민채무’도 슬슬 거론된다.
기후채무, 사실 근래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대 내내 탄소배출 책임이 적은 남반구가 먼저 기후위기를 맞은 불평등을 타개해야 한다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실제 주요 20개국(G20) 국가들은 전체 탄소배출량의 80%를 차지한다. 2009년 북반구는 마지못해 2020년부터 기후변화 공여금 1천억달러를 내놓기로 확약했지만, 지금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며 말로만 “탄소중립”을 되뇌고 있다.
식민지배를 통해 부를 축적하며 마음껏 탄소를 배출해온 북반구에 대한 분노, 식민배상은커녕 기후재난에 먼저 시달려야 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 그것이 애초 기후정의의 요체다. 기후정의 개념은 전세계 원주민과 풀뿌리 활동가들이 2000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주최한 기후정의 정상회담에서 처음 발아했다. 미국의 ‘환경정의’를 원용해 기후변화와 불평등의 관계를 폭로했다. 그리고 2년 뒤 정립된 27개 ‘발리 기후정의 원칙’이 현재 기후정의운동의 모체가 된다.
기후정의는 정부 간 기후협상 실패에 대한 기층세력의 반격이었다. 세계 정상들이 사상 처음 기후협상 테이블에 앉은 때는 1992년, 놀랍게도 1850년 이후 총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이 그 이후 최근 30년 동안 배출됐다. 잘난 엘리트들이 ‘감축’이라는 공염불을 외는 동안 배출량은 외려 걷잡을 수 없이 폭증했다. 심지어 1990년 이후 부자 나라들의 배출량은 늘어났는데 북반구에서조차 노동자와 중하위 계층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되레 감소했다.
각국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시장과 기술발전에 기반한 대응을 유일한 해법인 양 주창하고, 자칭 기후전문가와 보수 환경운동이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이미 산업화 이전보다 1.2도 상승했다. 2021년 에너지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지금 당장 모든 인간 활동이 멈춰도 금세기 말에는 2도 이상 상승한다. 불과 얼음의 재난은 벌써 도착했다.
‘탄소중립의 시간’은 실패한 시간이다. 탄소중립 자체가 세계의 모서리들과 약자의 삶이 붕괴해도 자본축적 공간만은 지키겠다는 북반구 녹색자본주의의 느려 터진 위선의 타임라인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모두 탄소로 환원하는 물신주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원자 단위로 형해화한다.
반면에 ‘기후정의 시간’은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타임라인이다. 불평등을 끝없이 양산하며 이윤을 축적해온 자본주의가 재앙의 원인이며, 해법 역시 불평등을 없앤 탈탄소 사회로의 담대한 체제전환이라고 여긴다. 슈퍼 부자 10%가 절반 이상의 탄소를 배출하는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탄핵이자, 자연과 남반구와 여성과 노동자들이 전환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풍경에의 갈망이다. 탄소중립이 녹색자본주의를 위한 기득권의 시간이라면, 기후정의는 아래로부터 분기되는 기층 민중의 시간이다.
지난 9월24일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기후정의행진은 ‘탄소중립’에서 ‘기후정의’로 한국 시민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징적 순간이었다. 참가자 규모보다 놀라웠던 건 광장을 진동시킨 언어들의 힘. ‘체제전환’ ‘불평등 타파’ 같은 손팻말 문구와 구호들이 길바닥에 선연하게 드러누웠다. 망가진 세상을 새롭게 복원하겠다는 풀뿌리들이 직조한 연대의 거미줄이었다.
자칭 전문가와 보수 환경단체들이 정부-기업들과 협치 명목으로 보조금에 눈독 들일 때, 저 밑바닥에서 시민들과 얼굴을 맞대고 치열하게 토론해온 다양한 풀뿌리운동 조직들이 있었다. 올해 50주년을 맞이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강연과 토론, 매체 활동 등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왔다. 앰네스티 주최 기후정의 강연에서 만났던, 불의한 세상에 대한 응전을 다짐하는 청소년들의 그 맑은 눈빛들을 잊을 수 없다. 기후정의운동은 그렇게 연대와 돌봄으로 연결된 풀뿌리들의 합창이다. 이제 막 시작한 우리의 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