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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라니, 염치없는 국가

등록 2023-03-13 18:32수정 2023-03-14 02:35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 평가
3·1절인 지난 1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6·15남측위원회가 마련한 ‘104주년 3·1절 범국민대회’가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려 양금덕 할머니 등 참가자들이 대회 뒤 외교부, 일본대사관 등으로 행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3·1절인 지난 1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6·15남측위원회가 마련한 ‘104주년 3·1절 범국민대회’가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려 양금덕 할머니 등 참가자들이 대회 뒤 외교부, 일본대사관 등으로 행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왜냐면] 이금규 | 법무법인 도시 변호사

전남 진도가 고향인 내 친구의 아버지는 10년도 더 전에 이웃에게 빌려준 돈을 지금까지도 못 받아 속상해하신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내 친구가 내게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묻는다. 공소시효! 그 10년이 다 지나기 전에 변제기(채무를 이행해야 할 시기)를 유예해 준 채무변제 각서 한 장 있다기에 ‘거짓말로 변제기를 유예받은 것도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형사고소했다. 그러나 검사는 친구의 아버지도, 돈 떼먹은 그 사람도 한 번 불러보지도 않고, 왜 돈 안 갚느냐고 추궁 한 번 없이 사건을 무혐의 처분하고 말았다.

불기소 결정문에는 ‘혐의없음’이라고 쓰고 그 옆에 괄호 열고 ‘증거불충분’이라고 분명히 씌어있건만, 돈 떼먹은 그 이웃이란 사람은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고, 친구 아버지는 죄인처럼 동네 고샅에서라도 그 사람 마주칠까 봐 무섭다. ‘주겠지, 주겠지’하며 기다린 세월이 10년이 넘어 이제서야 고소했건만 무혐의라는 면죄부만 받아줬으니, 친구 아버지는 고소한 것조차 바보 같은 짓이었다며 자괴감과 후회 속에 나날이 주름살만 더해가고, 자식은 더욱 죄스럽다. 그 사람 단 한 번이라도 ‘죄송하다’, ‘반드시 갚겠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면, 아니 그마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오다가다 마주치면 고개 숙이며 미안한 표정이라도 지었으면 이토록 속상하지는 않았으리라.

용서(容恕). 글자 그대로 너와 같은 마음으로 너를 품고 포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가해자의 진정 어린 사과가 있어야 피해자도 가해자의 마음과 하나 되어 품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염치 있는 사람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있으면 그 마음에 동화돼 그 사람을 품어 용서하게 되고, 그래서 피해자의 아픔도 치유되고 가해자의 죄의식도 덜어져서 화해가 이뤄지고, 다시 예전처럼 다정한 이웃이 되는 것,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돈 떼먹은 사람은 사과는 고사하고 검사로부터 무혐의 받았다며 더 뻔뻔해지고, 반대로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오히려 의기소침해진 친구 아버지를 보면서 염치와 사과, 용서와 화해라는 만고의 진리, 착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공식과도 같은 삶과 사람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부재한 현실이 아쉽고, 서럽고, 분하다.

일본의 강제징용은 역사적 사실이고, 가해자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하면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그 마음을 받아들여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가 이뤄지고, 그러면 일본과 우리는 다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틀렸는가? 그렇게 믿는 것이 잘못인가? 독일은 되고, 일본은 안 되는 것이 우리 탓인가, 일본 탓인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은가? 피해자를 탓하고 변명하고 소송하고 숨기고 시간 끌기가 옳은가?

사과하지도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그 누구도 피해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나약한 피해자를 향해 그럴 것이 아니라 그럴 힘이 있거든 용기를 내서 힘센 가해자를 향해 사과하라고 요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이 염치를 아는 사람의 도리이며,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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