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연합뉴스
홍범도 장군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 ‘범도’를 쓰기 위해 13년 동안 그의 삶을 추적하고 조사하면서 내가 반복해서 확인하게 된 그의 특징이다. 그는 말 많고 남 탓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나는 많지 않은 홍범도의 어록을 정리하고 옮겨 쓰면서 수백 수천번씩 그의 어록을 되뇌어 보았다. 그의 성격과 말하는 방법을 파악하고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까지 담겨 있다.
“남 탓하는 사람을 믿지 마라. 남 욕하기 좋아하는 자를 멀리해라. 대체로 남 탓하고 남 욕하는 자들이 더 나쁘다.”
홍범도 어록 1번이다. 그는 언제나 말이 아니라 상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설 ‘범도’에서 홍범도는 늘 말하는 사람의 입이 아니라 눈빛과 손발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범포수는 맞닥뜨린 호랑이가 아무리 포효해도 호랑이의 네 발에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
그는 머슴의 자식으로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참으로 불우했지만 단 한번도 남 탓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앞에 닥친 모든 난관을 이겨내며 성장했다.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는 남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어떤 세력가와 재력가에게도 줄 서지 않았으며 이익을 좇아 어느 파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가난한 동포들에게 성금을 걷으러 다니는 여느 독립지사들과 달리 그는 스스로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의 하역 노무자로 일해 총기를 장만했다. 시베리아 광산의 광부로, 고깃배를 타는 어부로 일해 모은 돈으로 탄환을 구입했다. 그런 홍범도를 무시하고 멸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에 조선 유림의 최고 수장이었던 유인석이 자신의 호인 ‘여성’과 같은 돌림자인 ‘여천’이란 호를 홍범도에게 붙여주며 형제 예로 존중한 것이다.
“남의 근력이 아무리 세면 뭐 하오. 남의 근력이 내 근력이 되는 걸 보았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힘이오.”(‘범도’ 14장)
이것이 남 탓하며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를 지적하는 홍범도의 어법이다. 책임을 떠넘기기 좋아하는 자들이 쓰는 가장 흔한 수법이, 없는 차이를 만들어 남 탓하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을 묵인한 미국을 비판하는 참모와 러시아를 힐난하는 참모가 서로 언쟁을 벌이자 홍범도는 묻는다.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는 것이오?”
두 사람 모두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대답하자 홍범도는 다른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들었소? 우리는 일본과 싸우면 되는 것이오. 로씨아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아니면 아미리가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없는 차이를 만들지 마시오.”(‘범도’ 14장)
없는 차이를 만들어 책임을 떠넘기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장군이 홍범도였다. 홍범도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크게 이긴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명정대’한 대일 선전포고에 따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전쟁인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홍범도는 대한 독립전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독립시키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권력에서는 가장 멀고 죽음에서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적과 싸우며 언제나 모든 책임을 기꺼이 감수했던 이가 소설 ‘범도’를 쓰며 13년 동안 항일무장투쟁 전선의 종군작가로 살았던 내가 만난 홍범도였다.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들이 남 탓만 하며 없는 차이를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영웅들을 이토록 모욕하면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가. 진정 홍범도 장군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랬다면 지금이라도 그의 어록 1번을 곰곰이 되새기며 반성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잘못을 반성하는 이들을 위해 홍범도 장군이 친절하게 준비해둔 어록 2번이 있다.
“잘못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오직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만이 잘못된 사람이다.”
홍범도 장군은 승리 앞에서 오만했던 적이 없고, 패배 속에서도 비굴했던 적이 없었다. 헌신은 무한했으나 바란 대가는 전무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오직 사람으로 대했다. 노선과 이념, 계급으로 사람을 가르고 상대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앞의 문제를 돌파했던 홍범도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여전히 배우고 따라야 할 모럴이다. 권력은 유한하고 모럴은 영원하다. 그의 흉상은 바로 그 영원한 표상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서 있다. 홍범도의 흉상을 1㎝도 옮기지 마라.
방현석 소설가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세월’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왼편’, 산문집 ‘하노이에 별이 뜨다’ 등이 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독립운동사 22장면’을 공저했다.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항일독립투쟁을 그린 두 권짜리 장편소설 ‘범도’를 지난 6월에 출간했다. 신동엽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