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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노 전대통령 국민장 이후 독자 추모글

등록 2009-05-31 20:26수정 2009-05-31 20:37

장자현실 pen336@hanmail.net
장자현실 pen336@hanmail.net
가학취미 수구언론이여, 진실의 씨앗 싹틀까 두려우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늘 바로 보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했다
그에게 “막가파”라고 “승부사”라고 덧칠한 수구언론이여
생살 긁어 피를 내고 소금을 뿌리면서 가학 취미를 퍼뜨렸다
그가 보복당할 일을 안했기 때문에 정치보복이란 표현도 당치않다

시인 유용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애칭 “바보”를 “바로 보다”로 새겼다.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기란 바로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임을 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려 노력하다 가신 분의 본질을 잘 정리해준 시인에게 감사한다. 이 기회에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음험한 세력이 그에게 덧씌운 그릇된 모습을 바로잡고 싶다.

먼저 “막가파” 대통령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던가? “바보”가 대통령이 된 직후, 검사들과 대화를 하다가, 젊은 검사가 “청탁전화”를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고 되묻고, 이제부터 양보하지 않고 토론하자는 뜻이냐고 분명히 말했음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음에도, 소설 쓰기 좋아하는 수구언론은 “막가자”로 바꾸었다.

“승부사 노무현”? 그는 사람 사는 세상,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를 바보라 부르고 승부사라 부르는 사람, 아니 집단은 누구인가? 그들은 기득권, 기성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 참으로 무모하고 도박과 같다는 패배의식을 심어주려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처세술이 뛰어나 언제나 이기는 편에 서고, 결국 자신이 언제나 이기는 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수구언론, 그리고 그들과 코드를 맞추는 사람들.

“막가파”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수구언론은 그가 사는 집을 아방궁에 비유하면서 틈만 나면 온갖 모욕, 생트집을 잡았다. 그들의 모욕과 생트집은 “바보” 대통령이 임기를 끝낼 때까지, 그리고 낙향해서 행복하게 사는 동안에 더욱 드세졌다. 검찰이 혐의를 흘리면,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신문들이 앞다투어 생중계했다. 멀쩡한 살도 자꾸 긁으면 피가 나는 법이다. 그들은 피가 나는 상처를 내놓고 소금을 뿌리면서 가학의 취미를 독자에게 퍼뜨렸다.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말투를 문제 삼았고, 품위가 없다고 했다. 그 공격이 먹혀들자, 최근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덧칠까지 했다. 검찰은 ‘포괄적인 뇌물죄’를 들먹이며 그를 모욕했다. 그러나 그 말로써 그들은 이미 그를 아무리 털어도 딱히 나오는 먼지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묻는다. 검찰은, 수구언론은 포괄적으로 무엇인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노무현에게 온갖 추악한 가면을 씌워 놓았으니, 포괄적인 승자가 분명하다.

포괄적 승자들이여, 노무현을 추모하는 어른의 어깨에 앉은 어린이가 든 촛불도 무서워서 끄는 어둠의 자식들을 보았는가? 포괄적인 승자는 죽은 이가 뿌린 진실의 씨앗이 싹트지 않을까 겁을 낸다.

모든 사람에게 제안한다. “정치 보복”이라는 말을 하지 말자. 노무현이 보복당할 일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보복인가? 그가 자신에게 최루탄을 쐈던 사람이나 세력에게 비합리적인 이유로 불이익을 준 적이 있던가? 그가 툭툭 던지는 진솔한 말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겠으나, 그의 말에 틀린 점을 찾기란 어려운데 “정치보복”이란 말은 당치 않다. 생트집, 가학적인 사람들의 생트집일 뿐.

노무현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는 수많은 “바보”여, 이제는 정신 똑바로 차리자. 선거혁명밖에 없음을 인식하자. 국론의 낭비를 막으려면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자. 대대적인 계몽운동이라도 벌이자. 우리가 그 일을 하여, 노무현이 편히 쉬시게 하자.

주명철/충북 청원군 강내면 탑연리


우리가 ‘상전’임을 일깨워주신 노짱

대통령도 검사도 판사도 경찰도
다 국민의 공복이라면서
서울광장을 머슴이 막아버리는
참담한 상황을 어찌 해득해야 하나

황혼이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석양이 찬란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임종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임종을 맞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동식물은 대부분 임종이 자연스러운데 유독 인간만, 호모사피엔스라고 동식물과 차별을 내세우는 사람만 죽음이 고통스럽다. 야생동물들은 죽음에 이르면 죽을 장소를 찾아 조용히 사그라지듯 사라진다. 이런 염원을 가꾸며 살아가다가 노짱의 자살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한낱 자연의 한 조각이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이르러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고통 없는 하늘에서 편히 쉬시라’고들 말한다. 정작 지켜야 할 때는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다가 죽고 나서야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한다. 노짱의 죽음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억울하다면 백만명이 국화를 바치고 천개의 만장이 휘날렸다고 하늘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의 애도는 한낱 헌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젊음을 희생한 많은 순국선열을 유난히 많이 묻은 민족이다. 그 독립투사들과 순국열사들, 그리고 더 많은 희생자들의 몫은 어디에 있는가? 남은 자들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이 목숨을 바쳐 희생한 대가로 얻은 목숨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는가? 목숨을 바쳐 돌아가신 영령들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기념일이 되면 가끔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참담한 몰골로. 그러나 그뿐이다. 참으로, 목숨을 바쳐 희생한 조국에서 그들의 피와 영혼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보다 더 참담하다. 그리고 헌사로써만 그들을 위로한다.

위정자들은 민심을 호랑이와 같다고 말한다. 국민의 공복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도 판사도 국회의원도 다 국민의 공복이라고 한다. 공복은 머슴이다. 말로만 머슴은 고개를 조아리다가 곧바로 상전으로 변한다. 국민은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이런 말장난에 속고 산다. 속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선거라는 것이 이렇게 맹랑하다. 국가나 정치제도라는 것도 이렇게 허술하다. 선거로 우리가 위임한 공권력은 설명은 다음에 하겠다면서 다섯살배기 손에서 촛불을 빼앗는다.

노짱의 자살은 우리에게 머슴과 공복 그리고 상전으로서의 위치를 일깨워주었다. 국민의 광장인 서울광장을 국민이 사용하겠다는데, 상전인 국민이 사용하겠다는데 공복인 머슴이 전경버스를 동원해서 막아버렸다. 주객전도다. 이걸, 이 참담한 상황을 어찌 해득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뽑아놓았으니 그렇게 당해도 싼가? 일제 강점기에는 공복이 머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마저 팔아먹었지 않은가? 오늘도 그때와 비슷한 민족적 시련기다. 서민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쫓기고, 자유와 민주는 폐기처분되었고, 북한과는 전쟁 일촉즉발 상황이다. 국지전이라도 일어난다면 애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노짱의 죽음이 우리에게 시사한 바는 바로 이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는 게 아니라 지금,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천만/광주시 동구 산수2동


진압당한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말이 자유로운 시절이 있었다
“공업용 미싱으로 박음질”해도 되고
권력자가 놀잇감이 돼도 됐다
최고 권력자가 바뀐 뒤
말은 소송당하고 형벌을 받았다

말들이 자유로운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누군가 언급했던 적이 있다. 이때 말들은 숨어 있던 자신들의 ‘비밀아지트’(비트)로부터 나와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이때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공업용 미싱으로 입술을 박음질’당해도 되었으며 바보라는 애칭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들은 때로 권력자를 뒤흔들었고 그들 권좌로부터 탄핵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격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말은 밖으로 나와 사방을 휘젓고 다녔고 아파트 가격을 치솟게 했고 부모들은 자식들이 이웃집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질까봐 노심초사했다.

당시 말들은 세계의 주인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항간에서 이야기하는 시기는 말이 ‘최고 권력자’를 통치하는 시기이다. 최고 권력자는 말들에 시달렸고 그 역시도 수많은 말들을 시민에게 쏟아내었다. 그런데 이미 떠도는 말들에 지친 시민들은 ‘최고 권력자’의 말들이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진실’이 은폐된 단순한 허구라고 생각했다. 이제 말들은 시민으로 하여금 최고 권력자를 놀잇감으로 삼도록 충동질했다.

떠도는 말은 ‘잃어버린 10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고 권력자’의 임기 종료와 더불어 시골로 내려갔다. 이제 말들은 오리가 뛰어노는 논에서 부엉이바위가 올려다보이는 밭이랑에서 촌부들이 김매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이제 말은 새롭게 선출된 ‘최고 권력자’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말은 거리로부터 물러나 카페에서 아파트 거실로 쉬쉬하며 입술에 손가락을 모으며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다. 말은 ‘최고 권력자’로부터 피해 달아났으며, 이들은 떠도는 말들에게 소송을 했고 각종의 형벌과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제 말들은 달아났으며 도시는 이전보다 조용해졌다. 이제 말은 ‘최고 권력자’의 입술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음질할 수 없었으며 ‘말들의 탄핵’은 완력으로 진압되었다.

어느 날 말을 밀실로부터 거리로 광장으로 이끌어냈고 그 말들이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웃음으로 견뎌냈던, 부엉이바위 아랫집으로 은퇴한, 이전의 ‘잃어버린 10년’의 대미를 장식했던 ‘최고 권력자’가 사라졌다. 말들은 이제 함께할 친구를 잃어버렸고 그곳에서 울기 시작했다.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전에 그들이 살던 거리로 달려갔으며 즐겨 찾던 세종로와 광화문, 대학로, 텔레비전과 신문의 지면으로 민첩하게 폭풍과도 같고 불꽃과도 같이 돌아왔다. 이제 말들은 그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품으로 뛰어들어 온 것이다.

말들이 다시 도심의 거리로, 광장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새로운 ‘최고 권력자’가 말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말들은 도처에서 그들의 가슴을 두드리며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진실이 떠난 말들에는 언제나 확증되지 않은 의혹이 있었으며 한 명의 권력자는 시민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말의 진실’을 위해서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말들이 이미 하늘로 가버린 최고 권력자를 향하여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말들은 언제든지 최고 권력자의 입술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음질’할 수 있도록, 또한 바보로 만들어 유쾌하게 웃을 수 있도록, 2009년 오월에 숨어 있던 말들이 하나씩 거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김승만/전남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슬픔을 표출하게 해야 한다

온 국민이 운다
이념과 지역을 떠나 운다
국민적 슬픔을 막아선 안된다
풀어지지 않은 슬픔은
또다른 재앙의 씨가 된다

온 국민이 운다. 이념과 지역을 떠나 운다. 누구는 슬퍼서 울고 누구는 화가 나서 울며 또 누구는 많은 사람들이 우니까 따라서 울고 또 어떤 이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운다는 게 화가 나서 운다.

우리는 슬픔을 몇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슬픔이란 본래 ‘분리 불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좋든 싫든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이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애착 본능’의 한 기능이라는 것이다. 즉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대상으로부터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즉 리비도를 철수시켜 새로운 애착의 대상을 위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바로 슬픔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슬픔은 ‘현실화’의 한 과정이 된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국민들로서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의 발생은 역시나 비일상적 감정인 쇼크와 스트레스, 무기력 등을 초래한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감정들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것이 바로 슬픔의 표출을 통해서이다. 즉 슬픔이 빠르게 표출되어야 더 신속하게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나 운다는 것이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가짐에도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는 것을 지극히 피상적으로만 평가하고 판단한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운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그의 지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침묵하거나 무관심해한다 해서 그들이 모두 반대자라 할 수도 없다. 슬픔이 표출되는 방식은 비단 눈물, 즉 우는 것만이 아니다. 때론 스트레스와 화냄, 그리고 우울, 죄의식, 무관심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문제는 국민적 슬픔의 표출 형태가 우는 것이든, 화를 내는 것이든, 무기력이든 침묵이든 슬픔이 신속하게 표출되도록 멍석을 깔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들이 그들의 슬픔을 표출할 기회를 갖고자 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국민들이 신속하게 현실감을 되찾아 일상으로 쉽게 복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상실과 그에 따른 국민적 슬픔의 표출은 새로운 애착의 대상으로서 새로운 정치 스타의 탄생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슬픔은 그것이 충분히 표출되지 못할 때 오히려 부작용은 심해진다. 슬픔이 표출되지 않으면 ‘트라우마’와 같은 비정형적 슬픔 반응이 유발된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개인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보다 공격적인 슬픔 반응을 유발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슬픔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쇼크에서부터 현실 수용에 이르기까지 포물선의 형태로 진행되지만 각 단계에서도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도처럼 밀려가는 ‘파상 동학’(wave dynamic)의 형태를 띠게 된다. 전체 슬픔 과정이 마무리되는 데는 통상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된다. 또한 슬픔 표출은 통상 1단계에서 쇼크와 부정, 그리고 심통과 패닉 단계, 죄의식과 화남 단계, 무기력과 수용 단계를 거치며 이행한다. 가장 극심한 슬픔 표출은 사별이 일어난 지 일주일에서 4주 사이에 찾아온다. 따라서 7일장인 국민장이 열리는 날부터 슬픔 표출의 정도가 가장 극심하게 된다.

국민의 슬픔을 도닥이고 관리해 국민 통합을 이뤄내야 할 정부는 슬픔이 가지는 이러한 동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요는 슬픔을 표출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풀어지지 않은 슬픔은 또다른 재앙의 씨가 된다.

강동구/동국대 불교대학원 생사의례학과 교수


당신이 떠나가고 나서야

당신이 떠나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당신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당신이 내 안에 있는 깊은 지독이었음을

당신은 늘 거기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을 늘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을 아주 멀리 떠나보내고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안에 있는 아주 깊은 모멸이었음을

당신이 떠나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을 아주 떠나보내고 나서야
당신이 떠내려간 세상이 참혹으로 울렁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떠난 마지막 웃음이
가만히 가만히 웁니다

김경주/시인


부엉이 바위에 올라

부엉이 바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저 밑에 걸어가는 사람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토요일의 당신
주중에 야근하고 잔업하고
모처럼 시간 내서 광화문에서 영화 보고
분향하려고 줄을 선
일요일의 처녀
자기를 버리고 남을 택하고
모든 것을 짊어진
안타까운 시간 6시30분으로 알람을 맞춰놓은
월요일 새벽의 어깨뼈 무거운 우리
검은 만장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
뙤약볕 아래 화요일의 당신은
대학로에서 저녁 타먹는 수요일의 아빠
밤새 돈까쓰를 기름에 튀겨내고
맛난 소스를 부어주다가 새벽 다섯 시에 퇴근하는
어스름 속 당신의 이름은
목요일의 주방 아줌마
전철 간에서 기관사가 브레이크 잡을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치며 춤을 추는
오늘은 과감하게 보라색 스타킹을 신고 나온
금요일의 미스 김입니다
청계천 물비린내 맡으며 산책 나온 오후에
저절로 발걸음을 돌려 하늘 쪽으로 향하는
새벽 다섯 시 반의 당신을 만납니다
12시가 되면 배고파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오는
하얀 와이셔츠 감색 스커트 푸른 옷깃
경호원과 당신 모두 함께
어깨동무하고 오늘 아침
흔들리며 출근합니다

성기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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