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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롯데호텔 ‘위대한 방’ / 조계완

등록 2015-08-16 18:26

“그냥 60층짜리 건물 두 개 지으면 어떻겠습니까?”(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123층 제2롯데월드타워 착공(2010년) 이전의 어느 해, 롯데그룹 최고경영자 회의. 고층 규제를 당국이 10여년째 풀어주지 않자 마침내 둘째아들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불쑥 꺼냈다. “나니?”(‘뭐라고?’라는 뜻의 일본말)(신격호 총괄회장) 짧지만 단호한 ‘나니’는 아버지의 불같은 역정을 뜻했다. 그 뒤로 60층은 ‘거역’의 동의어가 되었고 누구도 다시는 입에 담지 못했다. 팔순 노인 필생의 123층 집념 앞에서 “초고층은 돈 낭비”라고 여겨온 둘째아들의 경영 판단은 불호령 속에 대번에 묵살됐다. 창세기의 바벨탑처럼 타워는 갈등의 마천루가 되었고, 이것이 아마도 신동주·신동빈 두 형제가 다퉈온 극적 드라마의 서곡이 아니었던가 싶다.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 겸 거처는 ‘은둔 권력’의 비밀을 품은 방이자 ‘금수저·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두 형제 간 운명의 향배를 좌우하는 장소로 등장했다. 땅부자 ‘600만평의 사나이’로 불리며 한때 세계 부자랭킹 4위(<포브스>, 1988년)에 올랐던 아흔네살 노창업주는 그룹 한복판의 감독 자리를 끈질기게 자처했다. 거대 법인기업의 이사회가 열리는 곳은 ‘위대한 방’으로 불린다. ‘손가락 지시 경영’이 보여주듯 34층 지휘사령부는 기업 최고권력인 이사회를 사실상 대체하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주의 깊게 방어된 세계였다. 롯데그룹 고위 임원조차 “우리도 아는 게 전혀 없다. 가장 답답한 건 우리다”라고 토로한다. 총수 일가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불경’으로 여겨진다. 정치가들의 개인적 성벽은 항상 화제의 재료가 돼왔지만 유독 대기업 총수의 정신세계, 가정생활, 건강상태는 의문만 품게 한 채 소문의 벽 속에서 잔뜩 흥미만 자극해왔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재벌가 분쟁들이 보여주듯 재벌기업마다 경영권 소재지가 ‘불확실성’의 새 원천으로 터져나온다. 경영학이 등장해 조직적 집합체로서의 기업을 해명하기 시작한 이래 최고경영자는 시장경제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보이는 손’이란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경영 지휘부(이사회)가 이윤 동기라는 엄숙하고 신성한 원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 ‘손’은 시장경쟁이 아니라 주먹(자본력)과 술책을 뜻하기도 했고, 이윤 극대화에 도움만 되면 언제든 생산을 중단해 일자리를 파괴했다.

오늘날 거대 기업은 대학, 노동조합, 심지어 정부보다 더 우리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삶은 거의 완벽하게 상업화·상품화돼 있다. 만약 지구로 접근하는 한 화성인이 망원경으로 한국의 시장구조를 들여다본다면, ‘재벌기업 계열사’로 불리는 수많은 점들이 서로 이어지며 지배하는 그 광경에 깜짝 놀랄지 모른다. 인상은 실증과 일치한다. 1000대 기업(2013년)의 매출액은 총 2226조원으로, 연간 매출액 1조원 이상이 342개에 이른다. 경제력 집중·독과점의 ‘재벌체제’를 둘러싼 사회적 각축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벌은 번영의 기수이자 한국 경제의 독특하고 견고한 강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는 대기업에 선망·질투·비판의 복잡한 심사를 보낸다. 공고화된 체제에 맞서려는 자는 이제 ‘역사와 싸우는’ 셈이 되었다.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지배하는 기업의 크기는 기업가가 누리는 사회적 위신과 서열·특권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이른 아침 태양조차 주춤하고 뒤로 물러설 만큼 위압적인 재벌기업 사옥의 위용은 건축학의 이상을 넘어 기업(가)이 한 시대를 표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씨 일가의 ‘위대한 방’은 묘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며 치솟고 있는 제2롯데월드타워 114층에 새로 들어설 예정이다.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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