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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서울대 국사학과가 식민사학 총본산? / 오정택

등록 2015-10-07 18:46수정 2015-10-07 19:39

팔순도 훌쩍 넘긴 한 원로 역사학자의 발언이 9월18일치 <한겨레>(29면)에 크게 실렸다. 9월16일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주최한 ‘식민사관 극복과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학술대회’에서 한 발언이다. 발언의 요지는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죄를 만천하에 고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학자 이병도에 대한 비판은 학계 내에서보다는 학계 외부, 특히 ‘민족사의 영광된 모습’을 강조하는 인사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들의 비판 요지는 기사에도 나와 있듯 ‘이병도가 고조선 2000년사를 말살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병도 자신이 설립을 주도한 서울대 국사학과에 일제의 침략주의 사관, 즉 황국사관을 그대로 이식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들의 주장은 독재정권 시절 수사당국의 시국사범 관련 뻥튀기 발표를 연상케 한다. 기사의 제목마저 “아직도 역사학계에 ‘친일사학자 이병도’가 너무 많다”는 식이다. 아주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의 전형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 전제한다면 이병도는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이다. 수세대에 걸쳐 그 제자들과 학과 전체에 자신이 내린 유훈(?)을 신봉하게 만든 이병도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김일성을 능가하는 대단한 권력자다. 나아가 서울대 국사학과 구성원들은 이병도라는 수령을 맹목적으로 섬기는 로봇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이병도와 엮이지 않은 다른 대학 역사학과 구성원들 역시 이런 천인공노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공범이 된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역사를 스승의 가르침이라 하여 그대로 답습한다면 작은 인연에 의지해 대의를 저버리는 소인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대 국사학과 구성원들은 막강한 독재 권력에 주눅 든 무기력한 북한 주민이 아니다.

학계에 몸담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80년대초 국사학과 분위기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 분위기를 전한다면 그때부터 이미 이병도란 존재는 스승은커녕 학문적 관심 밖의 존재였다. 당시는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시대였고 파편적인 역사 사실에만 천착하여 이념과 역사관이 증발되어버린 이병도의 건조한 실증사학은 젊은 후학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라는 일제 주도의 역사편찬기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실증사학이란 역사적 사실을 이념적, 사회적 도구로서 현실에 적용하려는 역사학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학을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서의 황국사관에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상으로 오류다.

기사에서 원로 학자께서는 “이병도가 설립한 진단학회의 진단(震檀)이 단군조선을 의미함에도 그 학회지인 진단학보에 고조선사를 연구한 논문을 단 한편도 싣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진단학회가 황국사관의 지침을 추종해서라기보다는 실증을 표방하는 진단학보의 성격상 실증적인 근거나 사료가 태부족인 고조선 관련 논문이 실리기 힘든 당시 사정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제까지 역사와 관련된 음모론 수준의 발언들이 방치되어 온 것은 이들 주장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학계 차원에서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학계 바깥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주장을 학계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은 역사학의 기본상식을 벗어난 황당한 주장도 주장이지만 ‘민족의 영광스런 역사’라는 시각이야말로 일본의 국수주의 역사학의 인식과 발상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이면의 진실 때문이다.

하지만 더러워서 피하고 깜냥이 안 되어 무시한다는 학계의 편의주의적이고 안이한 생각이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인 발언이 학계 원로 학자의 입이나 진보적 중앙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거침없이 거론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했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움직임도 결국은 이 같은 비역사적인 사고의 사회적 유행과 만연의 궁극적 귀결은 아닐까?

오정택 서울 강남구 논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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