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디 김ㅣ원광대 명예교수
올해 벌써 세월호 7주기다.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울먹이면서 사과하던 담화를 출근하며 차 안에서 듣던 나는 그만 울컥하며 눈물이 고여 운전대 앞이 뿌옇게 보였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가슴 아프지만 사후 처리가 제대로 될 것이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최고 책임자가 저렇게 눈물까지 보이는데 누가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숱한 시간 동안 국민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온갖 훼방까지 한다는 소식들을 접하면서 그만 가슴이 무너져왔다. 거기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그런 태도에 동조하며 더욱 그악스러운 행위들을 해대고 있었는지 차마 옮기기도 힘든 표현들을 해대는 그들에게 수없이 묻고 싶었다. 그 세월호에 당신들 자식들이 타고 있었다면,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즈음 이웃과 산책하는 길에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에 그렇게 시끄러웠으면 되었지 이제 또 뭘 하자는 건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또 마음 한구석이 미어진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사과를 지금도 요구하고 있다. 왜? 피해 당사자들의 마음에 여전히 한의 응어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과거 나치가 저질렀던 만행을 끊임없이 사과하고 반성하며 “사과는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고는 생존자에게 매달 수백유로의 생존지원금을 지급하는 독일에 폴란드도 이스라엘 총리도 감사 인사까지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피해 당사자에 대한 보상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달리한 사람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한 위로와 억울한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함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지는 마음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겠는가. 국가건 개인이건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억울한 응어리가 남아 있다면 가해자는 충분히 풀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 의무와 책임이 국가라는 막강한 권력의 단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 잘 처리하겠노라고 공언까지 했으면서도 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탄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사람들은 최순실이라는 실체가 드러나서 그리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달리 본다. 대신 필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엄벌’의 단어를 떠올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월호 참사는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겠노라고 했으며 검찰총장에 임명된 윤석열도 꼭 그러겠노라 했다. 그러나 몇년의 세월이 지나 나온 진상규명이라는 게 모두 혐의없음, 무죄라는 뉴스로 귀결되는 걸 접하고는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절규가 절로 터져 나온다.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들은 오늘도 진실규명을 외치며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하고 가슴에 응어리진 한은 7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더욱 단단하게 심장 한가운데 뭉쳐 있을 수밖에 없다.
전 검찰총장 윤석열을 보고 누군가는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한다. 별의 순간을 잡는 일은 유권자들의 지지도만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음계로부터의 은혜로운 지원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천운도 더해져야 그 잡은 별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윤석열이 2017년 7월 중앙지검장에 오르고 사석에서 했다는 말, “어린 학생 수백명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는데, 저 사건의 원인과 책임자를 규명하지 않고는 다른 사건 수사를 할 수가 없다”를 보는 순간, 필자는 그가 ‘정의의 사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몇년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다가 2019년 11월 검찰총장 자리에 오른 그가 다시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발표하는 걸 보고 ‘그럼 그렇지’ 했다. 그런데 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아직 1년 임기가 남은 촛불정부 또한 새겨주길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며 대한민국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 내 이웃이 저렇게 응어리진 가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편하게 다리 뻗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