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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윤석열과 전언정치 / 이세영

등록 2021-06-22 14:44수정 2021-06-23 02:37

인간의 입을 빌려 전달되는 초월자의 말을 신탁(oracle)이라 한다. 원시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고대 그리스에선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가 빙의 상태에서 받아오는 아폴론의 신탁을 가장 영험한 것으로 여겼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의 예언도 신탁이다. 유일신 야훼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도 자기 뜻을 직접 밝히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정치 대리인’ 모세에게조차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은 없다”(출애굽, 33장 20절)고 으름장을 놓았을 정도다.

고대와 중세의 왕들 역시 신민에게 자신을 현시하는 일이 드물었다. 왕의 존재는 철저히 신비화됐고, 백성들은 기껏 동전에 새겨진 프로파일이나 관리들이 대독하는 칙령을 통해 왕의 얼굴과 말을 접할 뿐이었다. 형상을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존귀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선언하는 왕의 통치술이었다. ‘신비화’라는 이 유구한 테크놀로지는 현대 정치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오늘날엔 존엄을 과시하거나 무능을 은폐하고 싶은 정치인일수록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인색하다. 대중 앞에 나설 용기가 없거나, 자신을 드러낼 준비 자체가 덜 된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원시종교의 신이 영매를 통해 신탁을 내리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대리인의 전언 메시지에 의존한다. 준비된 자리가 아니면 대중 앞에 나서길 극도로 꺼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문고리 3인방’은 이 무능한 초월자의 신탁을 전하는 ‘정치적 샤먼’에 가까웠다.

대선 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행보가 입방아에 오른다. 본격 정치활동을 예고한 뒤 첫 행보가 기자 출신 대변인 선임이었던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비전과 진로를 궁금해하는 대중에게 직접 답을 주기보다 대리인의 간접 메시지에 기대려 한 것이다. 결국 상황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메시지의 비일관성이 문제가 됐다. ‘전언 정치’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초기 혼선’인지 ‘스타일상의 한계’인지, ‘근본적인 능력 부족’ 탓인지를 가리기엔 이른 게 사실이다. 그러나 판단의 순간은 예상보다 일찍 올 수 있다. 4년 전 반기문도 그랬다.

이세영 논설위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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