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집단학살·살해’로 번역되는 제노사이드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제노스’와 죽인다는 뜻의 라틴어 ‘카이도’를 합쳐 만든 조어이다. 폴란드 법률가 라파엘 렘킨이 1944년 처음 이 용어를 만들어, 나치의 조직적 인종학살을 설명하는 데 썼다. 제노사이드는 1948년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으로 국제법 지위를 얻었다. 협약은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없애려는 의도로 한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정의하고 있으며, 협약 가입국에 제노사이드를 막고 범죄자를 처벌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후 국제사회엔 몇차례 끔찍한 제노사이드가 벌어졌다. 1994년 르완다에선 후투족이 투치족 등을 집단학살했고, 1995년엔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교도를 집단학살해, 유엔 등 국제사회가 나섰다.
이번엔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이 제노사이드의 심판대에 올랐다. 가자에선 지난 석달 동안 이스라엘이 무장조직 하마스 소탕을 명분으로 폭격에 나서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2만5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말살하려 한다”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것이다. 지난 11일부터 이틀간 진행된 심리에서 남아공 쪽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무차별 살상하고 민간 인프라를 모두 파괴하고 있다”며 “이스라엘의 공격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쪽은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노력하며 국제법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이번 제소가 당장 팔레스타인 주민의 끔찍한 고통을 덜어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판결까지는 몇년이 걸린다. 제노사이드는 전쟁범죄나 인도에 반한 죄와 달리, 혐의자의 범죄 의도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있지만, 실제 실행될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지난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침략 중단을 명령했으나, 러시아는 듣지 않고 있다.
유대인은 80여년 전 나치에 의해 절멸의 위기를 겪었다. 홀로코스트는 이들이 겪어낸 끔찍한 고통을 되새기는 용어이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다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바로 그들이 거꾸로 집단학살의 법정에 가해자로 불려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제 더는 과거를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는 뜻 아닐까.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