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건강보험공단 제3차 사무논의협의회가 열리는 서울 여의도 한 호텔 앞에 주차된 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의 시위트럭에 고객센터 직원 직고용 반대 메시지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이재훈 ㅣ 사회정책팀장
지난 18일 택배노조의 파업이 일단락됐다. 이번 파업은 택배 노동자의 잇따른 과로사를 유발한 분류작업에 대한 책임을 사업자가 진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합의하고 끝났다. 이번 파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우체국 택배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우정사업본부의 위탁을 받아 일하는 개인 사업자 신분, 즉 특수고용직 노동자다. 그런데 이들의 파업을 두고 “명분도, 정당성도 없다”며 규탄 성명을 낸 사람들이 있었다. 우체국 집배원들로 구성된 한국노총 산하 우정노조다. 이들은 심지어 우체국이 택배 사업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업에 맞서 직장을 폐쇄하자는 말이 정규직 노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16일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조가 파업을 접었다.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민간위탁업체에 간접고용돼 있다. 건보공단이 업체를 바꿀 때마다 해고를 걱정해야 한다. 고객센터 노조는 지난 2월 1차 파업을 했는데, 이때 건보공단은 이들의 정규직 전환을 논의하는 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건보공단 정규직 노조가 참여를 거부했다. 고객센터 직접고용에 연대하길 원했던 정규직 노조 전 집행부가 지난해 조합원 투표를 했다가 “고객센터 직접고용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75.6%나 나왔기 때문이다. 올해 초 출범한 정규직 노조 현 집행부는 ‘고객센터 직접고용 반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건보공단 1층 로비에는 한 직원이 “공정 무시 직고용, 직영화 철회하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한다. 이 남성 곁에는 ‘#다시부러진펜운동’, ‘#공정의가치’, ‘#노력한자들의분노’ 등과 같은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어떤 언론들은 이를 ‘노-노 갈등’이라고 표현했다. 이해관계가 엇갈린 두 집단이 충돌한다는 얘기인데, 틀린 표현이다. 정규직 노조와 택배노조, 고객센터 노조는 이해가 엇갈리는 관계가 아니다. 우정노조는 “택배노조의 잦은 파업으로 또다시 집배원은 과로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정노조가 과로사 문제를 두고 따져야 할 대상은 택배노조가 아니라 우정사업본부다. 건보공단 정규직 노조는 “고객센터를 직접고용하면 기존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지만, 고객센터 상담사들은 직접고용되더라도 사무직군과 별도의 임금 체계를 갖추게 된다.
‘공정에 민감한 엠제트(MZ) 세대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틀렸다. <한국일보>와 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5~2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입사시험을 치르지 않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49.5%였다. 세대별로 20대 51.0%, 30대 43.3%, 40대 45.4%, 50대 48.4%, 60대 이상 55.4%였다. 세대별로 고른 답변이고, 20대보다 60대 이상의 비율이 더 높았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은 어느덧 신분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공정한 시험을 거쳐 정규직 신분을 획득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을 정당하게 차별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노력은 애초부터 공정하지 않다.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 자라온 환경에 따라 노력에 시간과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달라진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없는 사람은 노력조차 할 수 없다.
더욱 문제는 ‘정당한 차별’을 행하는 저들이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경쟁에 노출돼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왜 최근 들어 이 문제가 더 불거져 보일까. 기회의 평등을 말하던 정부에 그래도 기대를 걸었지만, 이 정부의 상징적 인물들이 스펙 품앗이로 자본을 세습하는 걸 보고 불평등한 세상이 더는 정치로 보정되지 않겠구나 체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변화보다 지금 가진 것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이 지옥도를 만든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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