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ㅣ젠더데스크 겸 젠더팀장
“정말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내 앞에 앉은 가해자의 가족은 계속 빌었다. 울면서 계속 사과의 뜻을 비쳤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로 가해자의 가족 앞에 선 나는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에 온몸이 긴장됐다. 그가 사과를 한 공간은 나의 일터였다. 나의 뜻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일터의 내 자리로 찾아온 그는 내 손을 잡고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내 귀에 와 박히질 않았다. 그저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가해자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나요?” 그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끝내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더 심해지기 전에 구해줘서 감사하다.” 미성년자를 성추행하고 약 7천개의 불법촬영물을 제작해 유포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최아무개가 24일 검찰에 송치될 때 언론 앞에서 사과의 뜻과 범행 동기를 밝혔다. 15개월 전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하며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배포했던 조주빈도 검찰에 송치될 때 말했다. “피해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 말씀 드린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 정말 감사하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의 뜻을 밝힌다. 피해 회복을 위해 가해자의 진심을 담은 사과가 필요하다지만, 정작 그들의 사죄는 ‘가해 회복’을 위한 일일지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주저 없음은 오로지 가해행위에 대해 조금이라도 덜한 벌을 받기 위한 행위일 때 등장한다. 조주빈은 1심 선고를 앞두고 “반성의 길로 걸어가겠다” 했지만 징역 45년형은 너무 과하다며 항소했다. 항소심서 그의 형량은 42년으로 줄었다.
사과는 이렇게 이용된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미디어도 가해자의 사과를 이용한다. 공분을 산 가해자를 가차 없이 시원하게 비난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가 또 없다. 지난 24일 최아무개가 성착취물을 만든 동기를 직접 밝히자, 그의 변명과 범죄에 이르게 된 서사를 그대로 퍼다 나르는 데 열중했다. 순식간에 수십건의 기사가 올라왔다. 그가 에스엔에스(SNS)에서 처음 접했다는 ‘놀이’라는 이름의 성착취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기사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배제된 건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들이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며 사죄해 거듭나는 악인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는 피해자의 입장을 이 사회는 고려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사과 쇼’를 피해자들은 막을 방법은 없는데, 그 텅 빈 사과는 ‘진지한 반성’이라는 양형 감경 사유가 된다.
지난 25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대법원에서 받은 2019년 성폭력 범죄 감경 사유를 공개했다. 판결문에 양형 기준 적용을 받았다고 기재된 성범죄 4825건 중 3420건(70.9%)의 감경 사유는, ‘진지한 반성’이었다. 그 진지한 반성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서비스 산업도 성업 중이다. 성범죄자 반성문 대필 업체들이 쉼 없이 돌아간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사회로 복귀하는 걸 두고 볼 수밖에 없다. 피해 회복은 없고, 가해자의 사회로의 빠른 복귀가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엔 명백한 사죄가 없다. 그러니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기를…. 악인의 길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 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영화 <우아한 거짓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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