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듀이의 ‘행함’, 우리의 ‘움직임’

등록 2021-06-30 18:15수정 2021-07-01 02:08

[세상읽기] 이병곤ㅣ제천간디학교 교장

지난 6월 우리 학생들은 길 위에서 배웠다. 학년별로 3주에 걸쳐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이뤄지는 학교 밖 이동학습을 우리는 ‘무빙’(moving)이라 줄여 말한다. 나는 30여년 전 사범대학 첫해 ‘교육학 개론’ 시간에 ‘행함을 통한 배움’이라는 근사한 교육사상과 만났다. 미국 교육의 아버지라 할 존 듀이의 교육 신조라 했다. 듀이의 이 언명은 당시 내게 ‘저 푸른 초원 위의 하얀 양옥집’처럼 멋진 관념적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일반고 1학년에 해당하는 4학년 아이들이 무빙 기간 탐구 주제로 잡아온 것은 지역사회의 환경 이슈였다. 제천시 상수도 취수장이 있는 영월군 남한강 수계에 ‘쌍용씨앤이(C&E)’ 회사가 대규모 산업쓰레기 매립장을 지으려 시도하고 있어서 연초부터 인근 시군까지 긴장감이 높아지던 터였다. 두달여간 준비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은 3주간의 프로젝트 일정을 짜기 시작했고, 일을 나눠 맡을 팀 4개를 조직했다.

제천시의회 의원, 제천시청 담당자, 원주 환경청 담당자를 만났다(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 10여명에 대한 면담은 불발됨). 제천과 영월을 오가며 거리행진, 전단지 나눠주기, 홍보를 위한 작은 콘서트를 했다.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로 회사 쪽 의견을 직접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매립장 예정 지역으로 가서 찬성 쪽 주민들 입장까지 들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강으로 직접 뛰어들어 신나게 놀았다. 한반도 지형 주변에서 뗏목을 탔고, 한반도습지 생태문화관에서 브이아르(VR) 체험을 진하게 했으며, 천연기념물 쉬리를 잡아 손바닥으로 느껴본 뒤 다시 놓아주었다.

간식 예산은 거의 쓰지 않고 되가져왔다. 지역사회 환경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고교생들에게 소상공인들과 주민들이 우유, 와플, 바나나, 아이스티, 생수와 커피 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거리 홍보를 나설 때 아이들이 촬영한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람들은 전단지를 받지 않거나 버리고 가기 일쑤다. 처음 마음 상했던 아이들은 이내 수습을 하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배포 작업을 이어갔다. 나는 그 허전한 공백을 바라본다. 무관심과 썰렁함을 대면하면서도 자기의 생각을 쉽게 접지 않는 마음 갖기, 그것이 진짜 공부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였다. 우리 편은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라도 하니 조금이나마 반응은 있구나. 이런 싸움이 정말 힘들구나. 오래 하시는 분들 대단하다.” 부모들을 초청하여 가진 마지막 날 발표에서 아이들은 3주 동안의 활동을 통해 성찰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했다. 21명이 제출한 소감문을 모두 읽어보았다. 낯선 사람들에게 말도 잘 못 꺼내던 소심한 아이는 연설문을 작성하고, 확성기 앞에서 주장을 펼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고 했다. 다른 아이는 힘든 일 겪으면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친구들 모습을 통해 자신도 용기를 얻었다고 증언한다.

프로젝트 학습은 대충 놀면서 시간 때우는 헐렁한 교육과정을 뜻하지 않는다. 학습자를 핵심 지식과 이해로 초대하는 공부 과정이다. 어려운 문제나 질문으로 시작하며, 지속적으로 탐구하지 않으면 학습을 앞으로 진전시킬 수 없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선택을 통해 학습 단계를 구성해간다. 배운 것을 실제에 적용하며, 성찰을 이뤄가고, 개선점을 발견한다. 모든 활동을 마치면 자신들의 발견과 깨달음을 나눌 수 있도록 공개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국가 교육과정이 이끄는 ‘공통교과’는 미래 사회를 열어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량을 체화하기에 역부족이다. 교과를 통해 지식만 가르치는 것도 문제거니와 교육 전체가 충분히 지적이지 못한 점이 더 큰 부실이다. 사고력이 부족하니 반성적 통찰까지 이르지 못한다. 창조성, 모험 정신, 복합 학문 분야에 걸친 지식의 통합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미래 교육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나 진정 미래 사회가 요청하는 이런 능력을 실제로 가르치고 독려하는 학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4학년 아이들이 곧 만들어낼 종합 보고서와 영상 다큐멘터리가 궁금해진다. ‘행함(doing)으로 배운다’는 듀이의 언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에서는 그것을 ‘움직임(moving)으로 배운다’로 치환했을 따름이다. 한국의 학교 현장이 당위에서 실전으로 빠르게 전환 가능하도록 새로운 물꼬가 트이길 갈망해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