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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군주론’ 마지막 장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

등록 2021-07-04 17:16수정 2021-07-05 02:39

[세상읽기]

김만권|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151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소책자 한권이 나돌고 있었다. 군주의 자질을 담은 이 책자는 이전에 없던 통치기술을 말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군주는 폭력과 간계를 쓰는 일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 이런 조언은 정치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는 오랜 지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당대의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군주론>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가 <군주론>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좋은 법률의 역할을 강조했던 인문주의자이자 로마의 공화정을 열렬히 찬양했던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주저인 <로마사 논고>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더군다나 <군주론>을 쓸 당시 마키아벨리는 복고된 메디치 군주정 아래 내란죄 혐의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뒤였다. 그렇다면 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썼던 것일까? 실제 여기에는 몇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첫째가 ‘일탈론’이다. 당시 몰락한 피렌체 공화국의 현실 앞에 메디치가 이 혼란을 수습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폭로론’이다. 겉으론 온갖 덕을 찬양하는 군주들이 실제론 어떤 나쁜 짓을 하는지 이 책자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기만론’이다. 이 입장은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를 속여 몰락의 길을 걷도록 유도했다고 본다. 마지막 네번째 입장은 ‘공화정 준비론’이다. 마키아벨리가 강력한 군주의 존재를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정으로 가는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공화정 준비론’은 언뜻 보면 전혀 달리 보이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잇는 다리를 놓는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스페인과 프랑스 같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상업도시국가 간의 경쟁 및 이탈리아 내 영토를 지니고 있던 교황의 정치개입으로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지도자의 자질은 더 이상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 속에 분열된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모아낼 권력과 이를 실현해낼 용기와 지혜였다. 이런 이유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정치지도자들을 향해 그 권력을 잡기 위해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를 갖추라고 강조한다.

더하여 <군주론>의 마지막 장에서는 메디치를 향해 ‘히브리인들보다 더 종속되어 있고,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억압받으면서도, 아테네인들보다 분열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조언한다. 더불어 도시국가의 정체성으로 흩어져 있는 이들을 이탈리아인들로 통칭하며 군주에게 그들 안으로 뛰어들라고, 분열된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라고, 마침내 통합된 이탈리아인들과 하나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마키아벨리에게 권력투쟁은 분열된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함이고, 이 분열 속에 권력을 획득한 군주는 더 이상 국가의 주인이 아닌 자신이 하나로 만든 집단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요즘 여야의 주요 정치인들이 당내 대선 후보로 출마 소식을 알리고 있다. 새삼스레 <군주론>을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랜 시간 소모적인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이 말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 갈등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열된 집단의 통합을 강조했던 마키아벨리조차 <로마사 논고>에서 볼 수 있듯 사회 갈등 자체를 문제로 보진 않았다. 오히려 로마에서 원로원과 인민의 갈등은 공화국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 갈등을 성문화된 법을 통해 제도적 장에서 풀어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갈등을 제도적 장에서 풀어내지 못할 때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갈등은 분열만 촉진할 뿐이다.

현재 우리 정치는 제도적 해결력은 보여주지 못한 채, 철저히 갈라진 정파적 입장에 따라 무조건적인 반대,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 일상이 되었다. 지금 대선에 나서는 주자들은 이념, 계급, 정체성 등으로 이 땅의 사람들을 갈라쳐 분열시키지 않으면서도 정치할 준비가 되었는가? 사회 갈등을 제도적 장에서 적극적으로 풀어내며 분열된 우리를 하나로 모아낼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고 마침내 하나로 모아낸 사람들 속에 자신은 사라질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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