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한승훈 ㅣ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지난달 22일 개신교 교단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인 ‘평등에 관한 법률’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평등에 관한 법률안’의 숨겨진 내용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대국민 서신’은 여러 의미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다. 이 글은 특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애자의 헌법상 기본권인 양심, 종교, 학문,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자연 질서가 파괴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서신에 의하면 그 결과란 이상기후와 감염병의 공격, 일부일처제의 붕괴, 그리고 헌법과 법질서의 근본적인 해체다. 물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의해 혐오 발언을 처벌하게 되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홍성수가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은 교리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으면서, 유독 정치적, 사회적 소수자를 혐오하고 싶을 때에만 이를 들먹거리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상 ‘차별할 권리’에 대한 요구다.
순진한 관찰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는 가장 핍박받는 자들을 이웃으로 환대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런 이웃을 신을 대하듯 대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설령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예수를 따른다는 교회가 혼신을 다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열을 올리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현실 속의 제도종교가 교조의 사상과 실천을 있는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만 해도 예수 이전 수백년 동안 이어진 히브리 전통, 예수 당대의 헬레니즘 문화, 그리고 교단 설립 이후 2000년 가까이 형성되어온 역사 등이 겹겹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런 ‘오염’들을 제거하고 ‘역사적 예수’의 순수한 가르침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여의치 않다. 예수에 대한 기록들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근대 역사학의 사료비판 방법을 적용하면 대체 그런 인물이 실존했는지조차 확언할 수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어려움을 딛고 예수 자신의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은 사상들을 추려내 보았을 때 생긴다. 예수는 건물 형태의 성전을 부정했고, 재산의 사적인 소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였으며, 무엇보다 성직자들의 권위나 그들과 결탁한 억압적인 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그런 운동이 제도화된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포기한 대가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로 지탱되는 체제를 옹호하기보다는 거기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성소수자의 온전한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면 기존의 질서가 흔들릴 것이라 우려하는 교계 인사들은, 예수보다는 그의 활동에 위협을 느끼고 십자가에 못 박은 당시의 권력자들에 훨씬 가깝다.
그들은 왜 차별금지법이 세상에 위험을 가져올 거라고 믿을까? 한교총은 자신들의 요구가 “단순히 기독교회의 교리 때문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은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가 위치지정적 세계관(locative worldview)이라 부른 좀 더 일반적인 종교적 세계관의 일부다. 이에 의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경계를 넘는 것, 권위에 도전하는 것, 배제된 존재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은 질서를 해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서란 신적인 권위에 의해 정해진 너무나 성스러운 것이라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사회가 무너지고, 우주가 무너지며, 그 결과 인간 세상에는 끔찍한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런 세계 인식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자유’나 ‘권리’를 넘어 ‘의무’에 가깝다. 정상성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공공의 공간 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과 대등한 정도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막음으로써 그들이 얻는 이득은 적지 않다. 세계의 혼란과 위험을 막기 위해 신성한 질서를 수호할 자격과 권위를 다름 아닌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런 의무를 부여한 체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그것을 용납해야 하는가? 아니라면,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정해진 자기 자리”에 머물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