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김경욱 법조팀장
명성황후의 표상은 구한말 열강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한 ‘조선의 국모’다. 일본 낭인의 칼날 앞에서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지엄하게 외치며 최후를 맞는 모습은 많은 이들이 그를 떠올리는 이미지다. 그런데 이 집단기억의 밑바탕은 상당히 취약하다. 명성황후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보는 그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됐다는 사실 말고는 딱히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청나라·러시아 등 외세를 이리저리 끌어들였고, 부정부패로 얼룩진 민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순종)을 위해 굿과 제사를 벌이느라 국고를 탕진했다는 문제는 묻혀버린 지 오래다. 그저 죽음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는 신화만 빛날 뿐이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발언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는 2001년 <한국방송>(KBS) 드라마 <명성황후>와 이 드라마의 주제곡인 조수미의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를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다. ‘조선의 국모’라는 표현은 1994년 이수광 작가가 소설 <나는 조선의 국모다>를 펴내기 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말이었다.
신화는 맹목적 믿음체계다. 허구와 왜곡된 상상력에 기반을 둔 믿음은 합리적 의심을 지우고, 복잡다단한 사실관계를 덮어버린다. 비단 옛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실 정치에서도 이런 신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달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두고 나타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지지자들에게 각인된 윤 전 총장의 표상은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선 정의로운 검찰총장’ 정도로 압축된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던 그가 무슨 수사를 벌여왔는지. 앞선 정부에 견줘 특별했는지.
문민정부 이후 역대 검찰은 대통령의 가족, 측근 등 이른바 살아 있는 권력의 심장부에 칼을 겨눠왔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검찰은 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를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기소했고, 국민의 정부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 김홍걸씨를 금품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해 유죄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인사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노 대통령 집권 2년 차의 일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선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 등 대통령 측근들이 금품비리 등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됐다. 다만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박근혜 정부의 경우, 대통령 탄핵이라는 유례없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 수사가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윤 전 총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가 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했다고는 하나, 역대 검찰의 성과와 견줘보면 사실 초라하다. 윤석열 체제에서 이뤄진 권력 수사 가운데 앞선 정부에서와 같은 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대통령 측근 수사였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일가 수사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126일 동안 수사를 벌여 조 전 장관에게 적용한 혐의는 자녀 입시 및 사모펀드 비리, 감찰 무마 등이었다. 다소 허망한 수사 결과라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왔던 이유다.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윤 전 총장의 ‘정의’와 ‘공정’ 이미지도 자동화된 믿음체계에 가깝다. 실체가 불분명한 이른바 ‘윤석열 엑스(X)파일’ 아니더라도 그와 가족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혹들이 제기된 상황이다. 특히 윤 전 총장의 아내 김건희씨와 장모 최아무개씨는 각각 주가조작 의혹과 사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수사 또는 재판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요양병원 불법 개설 및 요양급여비 부정수급 혐의를 받아온 장모 최씨가 지난 2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윤 전 총장은 재임 시절 권력자와 그 가족의 부정부패에 수사역량을 총동원해가며 법치와 정의의 수호자를 자임해왔다. 그랬던 그가 정작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처가와 거리를 두고 있다. 신화는 벗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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