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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루마불이 현실이 될 때

등록 2021-07-13 13:56수정 2021-07-14 02:40

<부루마블>의 원작으로 알려진 보드게임 <모노폴리>. 픽사베이
<부루마블>의 원작으로 알려진 보드게임 <모노폴리>. 픽사베이

[세상읽기] 이원재
LAB2050 대표

추억의 보드게임 ‘부루마불’은 주사위를 던져 땅을 차지하고 건물을 지은 뒤, 다른 참여자들한테 지대를 받아 재산을 모두 빼앗으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가장 비싼 도시는 서울이었다. 땅값이 뉴욕·런던·도쿄의 세 배인 100만원이나 됐다. 건물을 짓지 않고도 통행료를 엄청나게 받을 수 있으니 이곳만 차지해도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서울 살던 어린 나는 게임 속 비싼 땅값이 그저 자랑스러웠다.

서울 아파트값이 지난달까지 1년 동안 평균 24% 올랐다. 케이비(KB)국민은행의 자료다. 부루마불의 세계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자랑스러움은 두려움으로 변해가고 있다.

부루마불 이상의 현실을 이미 구현한 나라들도 있다. 영국 런던의 비숍가를 보자. ‘억만장자의 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10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대저택이 즐비하다. 그런데 이 비싼 집들 중 상당수가 빈집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런던 집값이 워낙 치솟으니, 억만장자들이 투자 목적으로 사들인 뒤 시세가 오르기를 기다리며 방치해두고 있다는 것이다. 집이 ‘주거 공간’이기를 멈추고 온전히 ‘투자 자산’이 되어버린 시대의 음울한 풍경이다.

미국의 슈퍼리치들을 보자. 올해 1분기 미국의 최상위 1%는 전체 자산의 32%를 갖고 있고, 상위 10%로 넓히면 70%를 갖고 있다고 연준은 집계했다. 나머지 계층은 거의 가진 게 없다는 이야기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산을 갖게 하고, 끊임없이 자산가격이 오르도록 해주면 어떨까? 유혹적이지만 위험한 말이다. 그러다 역동성을 잃은 사회가 자산가격으로 경제를 떠받치려던 일본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수십년 불황을 겪고 있다. 미국은 ‘오너십 사회’를 외치며 가계부채를 늘려 주택시장에 불을 붙였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다.

사실 한국의 자산격차는 이들 나라와 비교하면 아직 시작일 뿐이다. 불과 70여년 전 토지개혁을 통해 비교적 평등한 자산 분포를 만든 뒤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형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의 고삐가 풀리기 시작한 건 소득격차가 본격화한 1990년대 초반이다. 소득불평등은 금융위기 이후인 2000년대 들어 고용불안과 맞물리면서 확대된다. 그 뒤 한 세대가 지났고, 격차는 차곡차곡 누적됐다. 본격적 자산불평등이 시작될 시기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높아져가는 땅값 앞에 점점 더 초라해지는 ‘땀 값’이다. 땀 흘려 일하는 데만 집중하던 성실한 사람들의 깊은 좌절이다. 건널 수 없는 계층의 강을 마주할 때, 그들의 분노는 누구보다 클 것이다.

그 좌절감을 낚아채 성공했던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이른바 ‘러스트벨트’의 실직한 백인 노동자들은 부유한 엘리트를 지켜보며 박탈감을 키웠다. 트럼프는 이들의 분노를 여성과 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전환시켜 정치적 동력으로 삼았다. 민주당 지지세가 높던 지역이 순식간에 트럼프 지지 지역으로 변모했다. 최근에는 한국인 혐오, 아시아계 혐오와 폭력으로까지 번졌다.

우리 사회에서 자라고 있는 박탈감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불평등한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린다. 미국과 영국이 그렇다. 역동성을 잃은 사회에서는 이동이 어렵다. 일본이 그렇다. 그 길을 따라갈 수는 없다. 어떻게든 행복하면서도 역동적인,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첫걸음은, 땅을 가진 사람들 탓에 땀 흘리는 사람들이 초라해지지 않게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부동산에 적절한 과세를 하고,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모든 조처가 그래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부동산 관련 세제는 토지보유세로 알려져 있다. 주택과 달리 토지의 가치는 한정된 위치에서 나오므로 개인의 노력으로 높아질 수 없는 것이고, 거래세와 달리 보유세는 거래와 활용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의 종부세와 재산세 완화 안이 미국형 불평등, 영국형 빈집, 일본형 불황으로 가는 긴 터널의 입구가 될까 두렵다.

부루마불의 원조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토지 독점의 문제점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만든 ‘지주게임’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 단일세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게임이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는 운 좋게 땅을 차지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땅을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사회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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