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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헌절을 맞이하여

등록 2021-07-18 17:32수정 2021-07-19 13:12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대한민국 헌법은 130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진 법이다. 그 안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지향과 구조가 모두 정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전문에서 공동체의 역사와 지향을 개괄한 뒤 1조부터 9조까지 국민, 영토 등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요소를 정의하고 민주주의, 공화주의, 국제평화주의 등 대한민국이 추구할 가치를 나열한다. 10조부터 39조까지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장이다. 제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시작으로 평등권, 적법절차 원칙, 거주이전·직업선택·주거·사생활·통신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 재판청구권, 교육권, 노동권, 환경권, 사람답게 살 권리 등 기본권과 국방·납세의 의무, 그리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가 차례차례 열거된다. 이 부분이 헌법의 백미다.

대학 졸업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시험과목으로서 처음 접한 헌법이었지만, 매료되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규정한 뒤 그 권리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호 보장될 수 있도록 국가 공동체의 틀을 설계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인간이기에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고 다양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권리의 실현을 보장받는다. 거기에서 오는 행복감이 존재했다.

한편으론, 80년대 초반에 나고 자라 국가를 어버이처럼 생각했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존재로 느꼈으며, 알게 모르게 대통령을 저 높으신 분으로 우러러봤던 내게 헌법은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충격적인 법이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니, 주권자는 국민이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통치권한을 위임받은 자에 불과하다니.

시험공부를 하다 말고 히죽히죽 웃거나 감동받아 눈물을 훔쳤다. 누가 보면 수험 스트레스에 미쳤다고 생각했을 모습으로. 헌법 공부를 하면서 느낀 행복감과 충격을 모두와 공유할 수 있길 바라면서 법조인이 되었다.

요즘은 헌법이 참으로 많이 소환된다. 수많은 사안에 있어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헌법정신을 명분 삼아 주장을 펼쳐낸다. 초등학생인 내 아들은 학교에서 ‘국가가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답을 고르는 문제를 풀고 있다. 10년 전 헌법을 처음 접하며 놀라워했던 나와 달리 누구나 헌법을 친숙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나는 헌법의 효능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헌법은 실효적으로 기능하고 있을까.

헌법은 국가의 통일정책 수립 및 추진 의무(4조)와 여자의 근로 보호와 복지·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의무(32조, 34조) 및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해 정책을 추진할 의무(34조)를 규정하고 있으나 그에 근거한 통일부와 여성가족부의 폐지 주장이 거세다. 헌법은 노동자의 노동권과 단체행동권, 인간답게 살 권리를 규정하고 있으나 최근 발생한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을 둘러싸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로조건 아래에서 일할 권리’(32조)와 ‘노조를 결성하여 근로조건의 향상을 꾀할 권리’(33조) 자체를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의견들이 속출했다. 헌법은 재산권의 보장과 공공필요에 의하여 재산권이 제한받을 경우, 받을 수 있는 정당한 보상을 규정하고 있으나(23조) 팬데믹 아래 방역정책의 실시로 국민의 재산권 행사가 사실상 제한받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재산권의 수용·사용·제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한 보상은 충분히 논의되고 있지 않다. 헌법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존중과 권리들을 규정하고 있으나(10조에서 39조) 사람을 합격자와 탈락자로 가르고 권리를 누릴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의 소위 ‘능력주의’ 및 ‘공정’ 담론이 불평등한 현실을 압도한다. 아, 포괄적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은 아직도 제정되고 있지 않다.

헌법이 난무하는 사회인데, 정작 나는 헌법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행복감과 충격이 사실은 너무나도 나이브한 감정이었던 것 아닐까 불안해한다. 회의와 냉소로 빠지고 싶은 맘을 꾹 누르고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헌법의 효능감을 누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일단 제헌절이 다시 빨간 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하다가 오늘 하루 내가 마주할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응당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한다. 제헌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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